▲의열기념관 내부 모습의열단 활동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워낙 비좁아 단체 관람이 조금 힘들 수도 있다.
서부원
지난 3월 초, 오랫동안 방치되다시피 했던 그의 생가 터에 '의열 기념관'이 들어섰다는 소식을 접했다. 비록 국고가 아닌,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그의 조카가 사재를 털어 조성한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지만,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보수적인 지역에서 그를 기리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놀라운 변화다. 6.13 지방선거 당시 여당의 압승 분위기 속에서도 꿋꿋이 보수야당 출신 단체장을 배출한 곳 아닌가.
아직은 덜 알려진 탓인지 입구에 놓여 있는 방명록이 휑하다. 이곳 밀양과 부산 등 인근 지역 방문객이 대부분이다. 부러 방문 기록을 남기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방명록만 놓고 보면 광주는 고사하고 호남과 충청, 강원 지역에서 이곳을 찾아온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해설사가 되레 연신 고맙다는 말을 건네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2층으로 된 건물 전체를 둘러보는 데에는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1층 로비에서 상영하는 의열단 안내 영상과 김원봉의 육성 연설 장면마저 없다면, 전시된 내용을 꼼꼼하게 챙겨 읽어도 20분이면 충분하다. 말이 기념관이지 웬만한 가정집보다 규모가 작다. 만약 중고등학생 한 학급이 동시에 견학을 온다면, 서로 엉켜 관람이 불가능할 정도다.
시골 마을 도서관보다도 규모가 작은 이유는 콘텐츠가 부족해서라기보다 예산과 관심이 부족했던 탓으로 보인다. 마치 번화한 밀양 시내에 에워싸여 잔뜩 움츠리고 앉은 모양새다.
기념관 안팎 벽면에는 그와 동지들의 얼굴이 고등학교 졸업앨범의 흑백사진처럼 걸려 있다. 김상옥과 김익상, 나석주처럼 익숙한 이들도 있고, 박재혁과 김지섭처럼 낯선 이름들도 보인다. 하나같이 멸사봉공의 자세로 오로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식민지의 청년들이다. 그들이 자결하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때 나이는 고작 서른 즈음이었다.
기념관을 돌아 나오면 왼편으로 빈터에 검은 빗돌 하나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고향 선배인 김원봉을 따라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벌이다 산화한 석정 윤세주의 생가 터다. 선배 김원봉은 해방의 감격을 누렸지만, 후배 윤세주는 1942년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전사해 끝내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석정의 이름을 아로새긴 빗돌 앞에서 옷깃을 여미게 되는 이유다.
기념관 주변으로 어지러이 펄럭이는 태극기의 물결이 외려 묵념을 방해한다. 천변을 따라서 조성해 놓은 '해천 독립운동 거리'는 깃봉마다 내걸린 태극기가 주인이다.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 단원들의 얼굴과 업적 등을 벽화로 그려 놓았지만, 태극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다.
자타공인 '보수 1번지'인 땅에서 교과서에서조차 '빨갱이'로 낙인찍은 이를 기리는 태극기의 물결이라니.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했을 어색한 풍경이다. 조변석개하는 인심 탓인가 싶다가도, 세상이 한 걸음 더 정의로워졌다는 생각에 위안을 삼게 된다. 어쨌든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대한 나름의 예우일 테니까 말이다.
의거에 나서기 전 그들이 맹서하며 결의를 다졌던 태극기와 지금 기념관 주변을 뒤덮고 있는 그것의 의미와 가치가 같을 수 없다. 거친 비유일지언정, 마치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간 시신들을 덮었던 태극기와, 진압을 지휘한 계엄사령부 건물에 펄럭이던 그것의 차이라고나 할까. 근래 들어 태극기가 상징하는 가치가 훼손된 탓도 있을 듯싶다.
"나는 밀양 사람 김원봉이요."
영화 <암살>에 나온 이 대사 한마디로 우리 국민 모두는 김원봉을 공부하게 됐고, 덤으로 그의 고향이 어딘지도 알게 됐다. '잘 만든 영화 한 편이 열 교과서 부럽지 않은' 까닭이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뿌듯해 했던 고향 땅 밀양에서 그의 흔적은, 이곳 기념관을 제외하곤 거의 다 사라지고 없다.
고향을 지키고 살던 그의 혈육들은 6.25 전쟁 중 '보도연맹 사건'에 휘말려 대부분 몰살당했다. 극심한 좌우 대립과 미국과 이승만 정권을 등에 업은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월북해 북한 정권의 각료가 된 그의 가족들은 멸문지화를 피할 수 없었다. 당시 일제로부터 가장 큰 현상금이 내걸릴 정도로 독립운동의 거목이었음에도, 정부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