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채선 유족10월 20일 순천 팔마체육관에서 열린 여순위령제에서 임채선 유족이 "특별접을 제정하라" 외치고 있다.
배주연
당일 학술대회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가 넘도록 진행이 되어서 참석자들은 여순연구소에서 배부한 식권으로 순천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참석자들 중에는 유족들이 상당했다. 학생들은 갑자기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우르르 나타나자 다소 놀라워했다. 그때 기자와 동석했던 할아버지 두 명도 유족이었다.
그 두 분 중에 지난 10월 20일에 팔마체육관에서 열린 위령제에서 기자의 눈에 들어왔던 이가 있었다. 당시 "특별법을 제정하라" 소리치는 모습이 강하게 와닿아 촬영을 했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기에 저렇게까지 할까 궁금했으나, 촬영을 계속 하느라 미처 인터뷰를 할 시간이 없었다. 이름도, 어디에서 온 지도 알 수 없어 그저 여순 행사가 있을 때 다시 만나길 고대했는데, 이처럼 만나게 되어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즉석에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임채선씨는 1950년 생으로 광양 옥룡 추산리 출신이다. 순천에 거주한 지는 45년이 되었다. 당시 14연대가 백운산으로 이동했고, "산의 사람"이 민가로 내려와 식량을 가져갈 때 부친이 젊은이라 어쩔 수 없이 짐을 짊어진 것이 화근이 되었다.
졸지에 '부역자'가 되어 6,7개월 숨어 살아야 했다. 그러다 1950년에 정부가 국민보도연맹으로 좌익을 색출할 때, 뭣도 모르고 자수해서 3일 만에 순천 구랑실에서 학살되었다. 그나마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임씨는 보도연맹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가 유족회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부친이 24살인가에 모친과 혼인신고도 하지도 못해서 졸지에 법적으로 "총각"으로 사망했다. 그래서 "6.25둥이" 임씨는 결국 작은아버지 호적으로 올려졌다.
어려운 가정환경에 초등 2학년에 중퇴를 하고 먹고 사느라 갖은 고생을 했다. 부모복은 없어도, 사업운은 있었는지 돈을 제법 벌어 결혼도 하고 자녀 셋 모두 대학까지 보냈다. 훗날 임씨의 아들이 학사장교를 간다고 하자, 옥룡면사무소에서 조사를 세 번이나 왔다. 임씨는 "니는 못 간디. (아들에게) 말을 못해도... (직원이) 못 찾고 갔다. 아들이 군대를 갔다. 군대를 못 갔으면 내가 뭔 소리를 들었을지 모른다"라고 털어놓았다.
연좌제로 엮어서 아예 못 될 거라 여겨서 말렸는데, 그나마 생부가 '총각'이고, 자신의 호적은 작은아버지로 되어 있어서 아들이 무사히 군에 갈 수 있었다.
고향 선배의 소개로 광양유족회에 들어갔으나, 활동이 너무 저조하여 순천유족회로 옮겼다. "여그(순천)뿐만이 아니라요, 광양에가요, 너무 많은 숫자가 죽었어요. 근디 회원이 30명도 안돼요. '반란군'이라 손가락질 받을까봐 안 나타나요. 그래 억울해요." 당시 재가를 한 모친은 현재 생존해 있는데 "숨어서 지내라"며 유족 활동을 극구 말렸다. 그리고 처자식들도 "그간 벌어둔 돈도 있으니 그냥 편히 살지"라며 나서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어"라며, 부인도 말리는 것을 이젠 포기했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한자어로 '좋아할, 호', '낭만, 랑',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이'를 써서 호랑이. 호랑이띠이기도 합니다.
공유하기
주철희 교수 "항쟁은 억압에 맞서 싸우는 것"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