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어린이대공원 내 '박재혁 의사 동상 모습'부산어린이대공원 내 '박재혁 의사 동상 모습'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해방 후 독립운동가 유족과 후손 대부분이 그렇듯이 박재혁 의사 유족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 이치수는 아들의 순국 후 충격으로 눈도 잘 안 보이는 가운데 일제의 감시와 사회의 냉대 속에서 힘겹게 살다가 부산시 서구 서대신동2가 253번지에서 해방 후인 1949년 10월 8일에 별세하였다.
박 의사의 여동생 명진(明振)은 1909년 1월 11일 오빠와 14세 터울로 부산에서 태어났으나 그해 12월 10일 아버지의 사망으로,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두 남매를 키웠다.
여동생 박명진은 오빠의 제사라도 지내주라며 1960년 먼 집안 친척을 사후 양자로 입양시켰다.
13세 때에 오빠의 의거와 순국을 겪은 동생 명진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어머니의 각별한 보살핌으로 동래여고를 다니고, 고등학교 재학 때 선교사가 호주로 유학을 보내려고 주선하였으나 어머니를 혼자 두고 떠날 수 없어서 무산되었다.
명진은 20세이던 1929년 경남 양산의 만석꾼이며, 한말 경남지역 의병대장 서병희를 도왔던 김병희ㆍ김교상 부자의 장손인 김정훈과 결혼하였다. 오빠의 정신을 이어 의병 관계자와 혼인을 한 것이다. 남편 김정훈은 1946년 1월 27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