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례복 입은 동농 김가진뛰어난 외교관이자 개혁 관료, 당대 명필이었던 동농 김가진은 대한제국 대신 중 유일하게 해외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우리가 동농 김가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대한제국 대신(大臣) 중 유일하게 해외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라가 망했는데 녹을 받던 대신 중 독립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면? 동농이 아니었으면 싸우지도 못하고 국권을 빼앗긴 망국의 역사가 더욱 부끄러울 뻔했다.
동농 김가진은 1846년 1월 29일 서촌 신교동에서 태어났다. 앞서 말한 선원 김상용의 12세손이다. 장동 김씨 후손이지만 서자였던 그는 적서차별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문재(文才)를 인정받았다.
서른 네 살 때인 1877년 11월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돼 관직을 시작했다. 정조 시대 이름을 날린 사검서(四檢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 '사서'로 시작한 그의 경력이 이채롭다. 이후 근대 무기를 개발하는 기기국에서 일했고, 1883년 인천항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유길준과 함께 개화 업무를 담당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과 절친했으나 갑신정변이 났을 때 인천에서 일하던 때라 가담하지 않았다. 내무부로 옮기고 나서 고종을 세 차례 만나 개혁 정책을 올렸고, 1886년 2월 치러진 정시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수찬이 됐다. 개화기로 접어들며 인재를 파격적으로 등용하자는 방침에 따라 서얼도 과거 시험을 보고 고위직에 오를 수 있게 됐다. 서얼 출신이던 김가진, 이범진, 윤웅렬은 이런 분위기 속에 등용된 인재다.
과거 급제 후 동농은 1887년 5월 일본공사관 참찬관으로 파견됐고, 10월부터는 주일공사가 돼 도쿄에서 4년간 외교관으로 일했다. 그는 남다른 언어 습득 능력으로 일본어, 중국어, 영어에 능통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을 쓴 새비지 랜도어(Savage-Landor)는 김가진을 이렇게 평했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재기가 출중했으며 내가 만난 수많은 훌륭한 외교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1895년 갑오개혁 때 동농은 국군기무처 의원으로 홍범 14조를 비롯, 각종 개혁안을 만들었다. 1895년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하고 1896년 독립협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만민공동회에도 참여했다. 독립문의 한글과 한문 현판을 쓴 사람도 김가진인데 그가 당대의 명필이었기 때문이다. 창덕궁 후원의 관람정, 금마문, 부용정, 애련정, 희우정 현판과 주련에도 동농의 글씨가 남아 있다.
1897년 황해도 관찰사, 1904년 3월 농상공부대신을 거쳐 9월 법부대신이 됐다. 1905년 체결된 을사늑약을 민영환과 함께 반대했다. 을사늑약 반대가 좌절되자 1906년 충청도 관찰사로 자진 좌천했다. 순종이 즉위한 1907년 규장각 제학(提學)을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자신이 검서관으로 일을 시작한 규장각의 최고위직까지 오른 것이다. 말단 사서로 출발해 도서관장까지 된 셈인데, 규장각 검서관 출신으로 제학까지 오른 이는 그가 유일할 것이다.
해외 독립운동에 뛰어든 대한제국 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