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당시의 상황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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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에만 국한되지 않는 5.18 민주화운동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저항하던 시민들을 모두 진압하면서 작전명 '화려한 휴가', 광주진압작전은 끝났다. 그러나 5.18 민주화운동은 끝날 수 없었다. 5.18은 신군부의 정권장악 과정에서 국민을 무력으로 탄압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신군부의 정권 장악은 5.18을 기점으로 완성됐다.
그렇기에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열흘 동안 광주에서 발생한 사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군부라는 정당성을 상실한 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이었다. 5.18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곧 신군부 권력에 대한 심판이었다. 신군부의 광주 진압은 1980년 5월 27일 끝났지만 5.18 민주화운동은 5.18의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질 때까지 끝날 수 없었다.
5.18의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저항은 신군부의 광주 진압작전이 종료된 직후부터 시작됐다. 특히 신군부와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제기는 5.18 운동의 한 축을 이뤘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 주도의 연합사가 신군부를 지원 또는 묵인하지 않았다면 공수특전여단과 20사단이 광주 진압작전에 투입될 수 없었다는 주장을 근거로 했다.
1980년 12월 9일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광주분회장이었던 정순철과 전남대 학생이었던 임종수는 광주 미국문화원 철조망을 넘고 건물 지붕에 올라갔다. 그들은 지붕을 뜯어내고 석유를 부은 뒤 불이 붙은 신문지를 던졌다. 미국문화원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5.18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방화였다.
하지만 5.18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한 전두환 정권은 단순한 전기 누전 사건으로 덮으려 했다. 임종수는 재판의 최후 진술에서 "백성을 백주대낮에 학살한 저 살인마들은 지금도 권좌에 앉아 있고 너희들은 그 권력의 주구가 돼서 우리를 재판하고 있지만, 역사의 법정은 우리의 무죄를 알려줄 것이고 너희들의 유죄를 단호히 심판할 것"이라며 전두환 정권을 비판했다.
1982년 3월 18일에는 부산에 소재한 고신대 학생들이 움직였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건물로 지었으나, 당시에는 미국문화원으로 사용하던 부산미국문화원 건물을 점거한 후 불을 질렀다.
1983년 9월 22일에는 5.18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이 대구 미국문화원에 폭발물을 투척해 고등학생 1명이 숨지고 경찰 4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85년 5월 23일에는 서울지역 대학생 73명이 현재 서울특별시청 을지로청사에 있던 미국문화원을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86년 5월 21일에는 또다시 대학생들이 부산 미국문화원을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렇듯 5.18의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 하에서 계속됐다.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 정권은 어김없이 5.18의 진실을 요구하는 국민들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억압하고 처벌했다. 5.18 민주화운동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 시민저항운동의 한 흐름을 형성했다.
5.18 진상규명의 계속된 좌절
1987년 6월 항쟁은 1988년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었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12.12사건과 5.18 민주화운동이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국민들도 5.18의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강하게 요구했다. 결국 국회에서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청문회가 개최됐다. 무명에 가까웠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5.18 청문회를 통해 일약 스타로 떠오르기도 했다.
결국 1988년 11월 전두환은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백담사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그해 12월 양심수들을 석방하며 여론을 달래려 했다. 하지만 뒤로는 김영삼, 김종필 등 야당인사들과 합당을 통해 정국을 돌파하고자 했다. 국민들의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대한 기대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출범하면서 또 다시 좌절되고 말았다.
1993년 신군부의 노태우 전 대통령이 퇴임하고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국민들은 다시 5.18의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하지만 3당 합당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과 같은 민주자유당 소속이 됐고,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에게 5.18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1993년 5월 14일 김영삼 대통령은 이런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진상규명은 역사를 올바르게 바로잡고 정당한 평가를 받자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결코 암울했던 시절의 치욕을 다시 들추어내어 갈등을 재연하거나 누구를 벌하자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명예를 높이 세우는 일입니다. 진상규명과 관련하여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믿습니다. 진실은 역사 속에서 반드시 밝혀지고 만다는 것이 저의 확신입니다.
이제 미움과 갈등의 고리를 바로 우리 모두의 손으로 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에 다시 보복적 한풀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5.18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명확히 선을 그은 것이었다. 특히 5.18 진상규명을 "보복적 한풀이"라 칭한 것은 많은 국민적 분노를 야기하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는 오히려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여론에 불을 붙였다. 1994년 시민들이 전두환, 노태우 등을 서울지방검찰청에 고소·고발했지만 검찰은 피고소·고발인 58명 전원을 '공소권 없음' 결정으로 불기소처분을 했다.
검찰의 불기소처분은 오히려 5.18 진상규명 요구에 불을 붙였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결국 1995년 12월 19일 국회는 여야합의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5.18민주화운동법)'과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헌정범죄시효법)'을 제정했다. 그리고 1997년에는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됐다.
특별법에 의해 기소된 전두환과 노태우에게는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이 선고되었다. 이외에도 황영시, 허화평, 이학봉, 정호영, 이희성, 주영복, 허삼수, 최세창, 유학성, 차규헌, 장세동, 신윤희, 박종규 등에게도 유죄가 선고됐다. 하지만 전두환과 노태우 등은 바로 다음 정권인 김대중 정부에서 모두 사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