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과 김규식이 북한 김두봉에게 조국의 완전 독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안한 편지.
윤종훈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소총회에서 남한 단독선거를 결의하고, 이 궤도로 정국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1948년 봄)에서 단선ㆍ단전을 막고, 남과 북에 포진한 미ㆍ소 양군을 철퇴시키며, 남북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길은 남북협상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북행을 반대하는 세력은 미군정 뿐만이 아니었다.
총선에 참여하려는 다수의 정치인들과 이들에게 조종되는 청년ㆍ사회단체들이 앞장섰다. 사회적 분위기도 저해 요인이 되었다.
단선ㆍ단정을 반대하면서 4월 3일을 기해 제주에서 민중항쟁이 발생하자, 미군정은 군ㆍ경과 서북청년단원 500여 명에 군복을 입혀 현지에 보내 진압케하는 등 국내 정정이 지극히 소연한 상황이었다.
김구는 4월 19일 새벽부터 경교장을 포위한 협상반대 세력의 방해를 무릅쓰고 방북길에 오르고, 홍명회도 같은 날 서울을 떠났으며, 4월 20일까지 여운홍 등 10여 명도 방북길에 올랐다. 김규식은 신병으로 며칠 지체하다가 4월 22일 아침 민족자주연맹의 대표 원세훈ㆍ김붕준ㆍ최동오ㆍ신숙ㆍ김성숙ㆍ박건웅ㆍ신기언ㆍ강순ㆍ송남헌 등 16명으로 구성된 대표단과 함께 평양으로 떠났다.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남북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본회의가 열릴 때 단상에는 태극기가 게양되고, "동해물과"로 시작되는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이때까지 북한에서도 태극기와 애국가를 국기와 국가로 인정하였다.
연석회의는 세 분야로 나뉘어 열렸다.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대표자 연석회의), '남북조선 제정당 지도자협의회'(지도자협의회), 김구ㆍ김규식ㆍ김일성ㆍ김두봉의 4자회담(4자회담)이었다.
남북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545명이 참석한 대표자연석회의가 27일까지 열린데 이어 27일 저녁부터 30일까지 15인으로 구성된 남북 요인회담이 열렸다.
대표자연석회의는 회의를 마친 4월 26일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공화국과 북미합중국에 보내는 남북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 요청서'를 채택했다.
홍명희와 엄항섭이 기초한 것으로 알려진 이 문건은 연석회의에서 채택되고, 미ㆍ소 양국에 전달할 것을 결의하였다. 하루 전인 4월 25일에는 평양시내 김일성광장에서 북한주민 34만여 명이 모여 연석회의 축하 시민대회를 열렸다. 대표자연석회의는 4월 23일 '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를 통과시켜 남북에서 단독선거 실시를 중단할 것을 요청하였다.
연석회의가 끝난 후인 4월 24일 오후 6시 김두봉은 자택으로 김구ㆍ김규식ㆍ조소앙ㆍ조완구ㆍ홍명희 등을 초청하여 김일성과 합석한 자리에서 연석회의 결정서의 내용을 포함한 정치문제를 토의했으며, 오후 7시부터는 김구ㆍ김규식ㆍ김일성ㆍ김두봉 4인이 토의를 계속했다. 이 자리에서는 통일에 대한 남북 지도자의 공동성명, 통일을 위한 공동대책기관의 설립, 그리고 통일운동을 위한 조직문제 등이 논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