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오.
위키피디어백과사전
실무적으로는 유진오가 헌법기초위원회의 위촉으론 마련한 초안을 중심으로 심의되었다. 유진오는 초안을 작성할 때 임시정부의 약헌과 조소앙이 마련한 「건국강령」을 비롯하여 선진 각국의 헌법과 특히 독일 바이마르헌법을 많이 참고하였다.
제헌헌법은 심의 과정에서부터 정치세력간의 알력을 겪게 되었다.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고집하고, 한민당 측은 내각제를 선호하였다. 이승만은 자신의 집권이 예상되면서 강력한 대통령제를 원하고, 한민당 측은 대통령은 이승만을 선출하되 실권은 자신들이 갖는 내각제를 바랐다.
헌법기초위원회에서 합의한 헌법 초안은 내각책임제였다. 즉 상징적 대통령으로 하고 실권은 국무총리에게 부여하는, 국회에 의한 내각의 통제 등을 특징으로 하는 시안이었다.
이 헌법안은 6월 15일 국회의장 이승만이 돌연 헌법기초위원회에 출석하여 "직접 선거에 의한 대통령책임제가 적합하다"고 발언한데 이어 며칠 후 다시 나타나 "이 초안이 헌법으로 채택된다면 자신은 이 헌법하에서는 어떠한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민간에 남아서 국민운동을 하겠다"고 통고하였다.
대통령제의 지위가 아니라면 정부 참여를 거부하겠다는 협박성 발언이었다.
"이에 한민당 측은 고민에 빠졌다. 만일 김구ㆍ김규식에 이어 이승만 마져 정부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 정부는 약체정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21일 밤 서상일ㆍ김준연ㆍ조헌영 등 한민당 측 중진의원들은 이승만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박찬승,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렇게 하여 대한민국 헌법은 이승만의 권력욕에 따라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권력구조가 탈바꿈되어 6월 22일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채택되었다. 초장부터 '위인설관'의 비극적 운명을 타고 태어난 셈이다.
국회헌법기초위원회에 내놓은 유진오 헌법 초안의 제1조는 "조선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되어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로 이어진다. 당시에는 아직 국호가 결정되기 전이어서 통상적으로 조선이라 불리고, 대체적으로 '국민' 대신 '인민' 이라는 용어가 널리쓰였다. 미국독립선언이나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 유엔인권선언의 피플이란 용어는 국민보다 인민에 더 가깝다.
국회본회의 헌법심의 과정에서 국호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일었다. '조선'이라는 국호와, 고종이 1897년 건원칭제를 단행하면서 채택한 대한제국의 '대한(大韓)'을 회복하여 광복하자는 이름으로 다시 찾아 써야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결국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다.
헌법기초위원 30명 중 26명이 참가한 투표 결과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로 '대한민국' 이 국호로 채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