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소기업이 99.99999999% 불화수소 생산 기술을 2011년에 개발하고 2013년에 특허까지 내고도 생산을 포기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해당 업체 대표는 "대기업 입장에선 이미 사용 중인 일본산 불화수소를 쓰면 되는데, 굳이 우리 제품으로 바꿀 이유가 없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관련 규제보다 대기업의 태도가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말로 해석된다.
업체 대표는 "불화수소 말고도 소재·부품 분야에서 이런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라고도 말했다. 다양한 소재부품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소극적인 태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다.
얼마 전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대기업이 우리 중소기업 제품을 안 사준다"고 한 것에 최태원 SK 회장이 "품질의 문제"라고 답한 것이 화제가 됐었다. 어디 제품이건 품질만 좋으면 사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한 매체에선 대기업이 우리 기업 제품이라고 '애국주의'적으로 사줘서 될 일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품질이 문제라는 건 합리적 소비자의 입장이다. 소비자는 품질과 가격 등을 따져 가장 뛰어난 것을 구매하면 그만이다. 이런 소비자의 태도로는 미약한 산업을 육성시킬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이미 경쟁력을 갖춘 기업, 또는 나라만 영원히 기득권을 누리게 된다.
자국 산업을 발전시키려면 품질과 상관없이 자국 제품을 먼저 써줘야 한다. 미국은 싸고 좋은 영국 제품 사서 쓰겠다는 남부 지주들과 전쟁을 벌여(남북전쟁) 기어코 미국산 제조품을 쓰게 해 산업을 발전시켰다. 우리나라도 편하게 수입할 수 있는 외국산 제품 마다하고 국산품을 써서 대기업을 발전시켰다. 방위산업도 싸고 좋은 미국산 사서 쓰려는 군에게 억지로 국산무기를 쓰게 해서 발전시켰다.
우리 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의지가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이 미약했던 우리는 모든 부문을 발전시킬 수 없었고 그래서 몇몇 기업에게 한정된 자원을 몰아줬다. 이런 선택과 집중으로 오늘날의 대기업이 성장한 것이다. 심지어 한국인은 우리 제품을 수출가보다 더 비싸게 사줘서 우리 대기업이 외국에서 출혈 저가 판매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래서 대기업은 한국에서 가난한 집 맏아들 같은 존재다. 소 팔고 땅 팔아 맏아들 대학공부까지 시켰으니 이젠 맏아들이 동생들을 키워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대기업이 '품질 좋으면 사겠다'고 하며 품질 좋은 일본 제품만 사고 있으면 우리 중소기업들이 클 수가 없다.
문제는 의지다. 우리 중소기업을 살리고 우리 기술을 발전시키겠다는 의지. 과거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 대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를 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려면 대기업이 그저 합리적 소비자가 아닌 책임 있는 국민경제의 주체가 돼야 한다. 국가의 비상한 지원으로 컸으니 그런 정도의 사명감은 갖는 게 당연하다.
중화학공업 육성 당시엔 국가가 대기업을 우선적으로 키우되 일부 중소기업도 키우도록 강제했고 대기업 1세대에게도 한국 기술을 키우겠다는 결기가 있었다. 예를 들어 현대가 자동차공장을 처음 계획할 땐 변속기와 후차축을 모두 자사에서 만들려 했다. 정부가 우리 부품 중소기업에게 사서 쓰라고 강제하면서, 당시 중소기업 기술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현대가 우리 중소기업에게 해외 기술을 알선해주라고 지시했다. 그때 우리 중소기업의 경쟁력은 최악의 수준이어서 현대가 청소하는 법부터 알려주며 경쟁력을 향상시켰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1세대 부품 중소기업을 육성한 것이다.
70년대에 정부는 자동차 회사에 국산 부품 사용을 강제하다 나중엔 아예 부품수입 심사권을 부품 중소기업 측(자동차 협동조합)에 넘겨버리기도 했다. 한때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부품 수입을 심사하며 스스로 수입대체품목을 결정했다는 말이다. 엔진도 자동차 회사들이 국산 부품을 쓰지 않고 성능 좋은 완제품만을 수입하려 하자 국가가 엔진주물공장을 주도해 국산 부품을 쓰도록 했다.
한국 통신전자산업의 초석이 된 전전자교환기는 처음엔 너무나 전망이 보이지 않아 기업들이 개발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자 국가가 1차 개발하고, 이 제품을 한국전기통신공사에 몽땅 사게 해서 소비시장을 열었다. 그리고 삼성, 금성, 대우 등을 추가 개발에 참여시킨 것이다. 이런 식으로 10여 년을 육성해 품질을 올렸고 마침내 수출길을 열었다.
이제는 국가가 대기업에게 명령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대기업이 알아서 우리 중소기업 제품을 일부라도 소비하면서 함께 품질을 올려가야 한다. 보호육성이다. 이게 소 판 돈으로 공부한 맏아들이 할 일이다. 국민경제의 책임 있는 주체로서 말이다. 물론 국가도 소재부품기계 등의 중소기업이 성장하도록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과거 중화학공업 육성은 국가 존망을 건 결사적 지원으로 이뤄낸 것이었다. 그런 정도의 결기가 필요하다. 이제 부품소재기계 중소기업 육성까지 마치면 60년대에 시작된 경제개발 대장정이 비로소 일단락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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