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이 조직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참여한 김규식, 이승만, 김구(1946. 2.)
눈빛출판사
미국, 이승만을 남한의 지도자로 간택하다
1945년 9월 9일, 미군은 38도선 이남인 서울에 진주해 그날부터 미군정을 실시했다. 그들은 한반도 남쪽에 친미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춘추전국시대처럼 군웅할거 하는 많은 인사를 하나하나 저울질했다. 여운형, 김구, 김규식, 이승만 등 쟁쟁한 인사들이 물망에 올랐다. 결국 이승만이 낙점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미국 군부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그 이유는 그가 친미정권을 세우는 데 가장 적절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이승만의 행적을 살펴보자. 그는 1945년 10월 16일 귀국했다. 이승만은 귀국 직전 일본 도쿄에서 맥아더 장군과 하지 미군정 사령관을 만났다. 이들과 회합을 한 후 귀국한 이승만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과 한국민주당의 영수 직을 모두 거절했다.
대신 1945년 10월 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해 그 회장에 추대됐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초기에 조선공산당과 한국민주당 등 좌우익의 거의 모든 조직들이 참여한 단체였지만, 친일파 처리에 대한 이견과 이승만의 강한 반공주의로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계 인사들은 모두 이 조직에서 탈퇴했다.
1946년 2월 14일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를 앞두고 이승만은 미군정이 조직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참여해 의장에 선출됐다. 그러나 미군정이 소련군과 타협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 하자 그는 의장직을 사퇴하고 지방순회에 나섰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반대하며, 1946년 6월 3일에는 정읍에서 "남쪽만의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조직이 필요"하다고 발언해, 38선 이남에서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7년 9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됐다. 그 즈음 미국에는 매카시즘 선풍이 일었다. 반공 일변도인 이승만은 미군부에서 가장 선호하는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맥아더와 미 군부의 지지를 받는 이승만의 집권은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김구를 비롯한 다른 민족지도자들은 한낱 들러리에 불과했다.
그 무렵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자 이승만은 유엔 감시 하에서 실시되는 선거에 참여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이승만은 동대문구 갑 지역구에 단독으로 출마해, 투표 없이 당선됐다. 1948년 5월 31일 국회가 소집되자 선출된 국회의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가 의장에 선출됐으며, 7월 20일 국회에서 선거에 의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