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스털링(1804-1859)
위키피디아
제인 스털링은 상드와 동갑으로 쇼팽의 제자다. 오랜 시간 쇼팽을 흠모해오다 쇼팽이 상드와 헤어진 것을 알고 상드를 대신해 그와 결혼까지 생각했으나, 이를 듣고 깜짝 놀란 쇼팽은 선을 그었다. 그녀는 쇼팽이 런던에 도착하자 집과 가구뿐 아니라 오선지나 코코아 같은 소소한 물건들까지 챙겨주었다.
당시 런던은 파리에서 피난 온 예술가들, 베를리오즈, 탈베르크, 칼크브레너 등 넘쳐났고, 쇼팽이 이 경쟁에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다. 뭔가 놀라운 쇼나 기술을 보여줘야 하는데 쇼팽은 이런 연주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이때 '필하모니 소사이어티'에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해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쇼팽은 이 절호의 기회를 거절했다. 연습할 시간도 부족했고, 오케스트라의 수준이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않았으며, 무대 공포증에 체력도 받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쇼팽의 거절에 담당자는 기분이 상했지만, 영국 왕실에서 연주는 가능한지 물었고, 쇼팽은 이 제안은 받는다.
빅토리아 여왕을 필두로 고관대작들이 '스패토드 하우스'에 모였다. 여러 연주가와 성악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쇼팽은 영국 피아니스트 줄리어스 베네딕트와 함께 모차르트 이중주를 연주했고, 자신의 짧은 곡들도 연주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날마다 일기를 썼는데, 이날 일기장에는 "듣기 좋은 음악들이 연주되었다. 라블라슈, 마리오, 탐부리니의 노래가 좋았고 몇몇 피아니스트들이 피아노를 쳤다." 여왕의 귀에는 쇼팽은 그저 몇몇 피아니스트 중의 하나였다.
6월과 7월에 두 번의 연주회를 열었고 이 공연은 어느 정도 경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다. 하지만 7월 말부터는 공연 시즌이 끝나 버렸다. 어려움에 빠진 쇼팽에게 또다시 제인 스털링은 자신의 거주지인 스코틀랜드로 쇼팽을 초대했다.
런던에서 최악의 환경(스모그)에 노출되었던 쇼팽은 스코틀랜드에 도착하자 맑은 공기, 아름다운 풍광에 한시름을 놓았다. 제인 스털링은 언니와 함께 그를 데리고 다니며 귀족들에게 소개했고, 쇼팽은 에든버러와 맨체스터 등에서 몇 차례 연주회를 열었다. 특히 맨체스터에서는 무려 1200명의 관객 앞에서 연주했다. 하지만.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올라올 때 외양과 걸음걸이가 허약하고 고통스런 모습이었다. 그가 피아노 앞에 앉자 우수 어린 가냘픈 인상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순간부터 피아노가 그를 완전히 빨아들인 것 같았다. (중략) 대규모 홀 연주회가 요구하는 크고 뚜렷한 그림, 악기의 박력은 부족하다." - 맨체스터 가디언 지.
"그의 연주는 너무 섬세해서 청중의 열광을 자아낼 수 없었다. 쇼팽이 정말 안 된 느낌이었다." - 아일랜드 피아니스트 조지 오스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쇼팽은 제인 스털링 자매의 호의가 점점 숨이 막혔다. "몸이 더 약해졌어. 이제는 작곡도 전혀 못 하겠어……. (중략) 그러다가 두 시간 동안 사람들과 식탁에 앉아서 그들이 말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술 마시는 소리를 들어야 해. 지겨워 죽겠어. 그들이 예의를 차리니까 숨이 탁탁 막혀." 또 다른 편지에는 "내가 좀 더 젊다면 눈 딱 감고 기계가 되어버릴 텐데. 아무 데서나 연주회를 열고 돈만 된다면, 취향이고 뭐고 따지지 않고 엉터리 같은 작품도 연주할 텐데(쇼팽이 그셰마와에게 보낸 편지 중)". 쇼팽은 스코틀랜드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다.
파리에는 제인 스털링과 쇼팽이 약혼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답답해진 쇼팽은 11월 16일 런던, 길드 홀에서 열리는 폴란드인을 위한 자선행사 참가를 구실로 스코틀랜드를 떠나 런던으로 돌아왔다. 쇼팽은 이 행사에 기꺼이 무료로 연주했지만, 사람들은 쇼팽의 연주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슬프게도 이 자선연주는 쇼팽의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빈손으로 파리에 돌아온 쇼팽, 그를 도와준 사람들
쇼팽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로 돌아온 쇼팽은 빈손이었다. 그동안 작곡도 못 했기에 팔 악보도 없었다. 게다가 그동안 자신을 돌봐주었던 주치의 몰랑이 사망한 것을 알고 쇼팽의 불안은 커졌다. 쇼팽에게는 들라크루아나 프랑숌과 같이 쇼팽을 찾아주는 친구들이 있었으나, 쇼팽에게 필요한 건 당장 돈이었다. 집을 마련할 돈.
이에 손을 내민 사람은 오브레스코프 공주였다. 공주는 쇼팽의 제자였던 수초 공주의 어머니다. 오브레스코프는 쇼팽의 거처를 알아봐 주었다. 그리고 쇼팽이 혹시라도 자존심 상할까 봐 집세를 반반씩 내자고 제안한다. 집세는 400프랑이었는데, 공주는 쇼팽에게 200프랑이라고 말하며 쇼팽 몰래 자신이 집세를 다 냈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직감한 쇼팽은 누이인 루드비카에게 와서 도와달라는 편지를 쓴다. 루드비카는 곧바로 달려오고 싶었으나 남편이 제동을 걸었다. 루드비카의 남편은 장모가 여행경비를 다 내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자기 돈은 한 푼도 쓰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여기저기에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시간이 지체되었다. 쇼팽의 어머니와 동생 이자벨라는 여비를 구하지 못해 동행하지 못했고, 간신히 여비를 구한 루드비카가 쇼팽에게 달려갔다.
제인 스털링은 쇼팽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것을 알고 거금 2만 오천 프랑을 현금으로 쇼팽의 문지기에게 전달했다. 쇼팽은 이 사실을 몰랐다. 쇼팽의 손에 들어오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여튼 쇼팽은 이 돈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고, 겨우 설득해서 만 오천 프랑을 빌린 것으로 하고 받았다. 루드비카가 도착했다. 누나를 만난 쇼팽은 반짝했다.
루드비카는 상드로부터 쇼팽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받았다. 하지만 회신하지 않았다. 쇼팽은 누나의 품에서도 "내가 죽을 땐 상드의 품에서 죽기로 했었는데"라고 상드를 그리워했다. 그토록 쇼팽이 그리워했던 상드와 재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상드와 이별하고 10개월 후, 우연히 초대받은 집에서 스치기는 했다).
9월 중순, 쇼팽은 마지막 거처가 될 곳으로 이사한다.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러 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쇼팽은 의식이 있을 때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루드비카와 차르토리스카 공작부인, 구트만이 매일 그의 침상을 지켰다.
쇼팽은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불러 달라는 부탁과 자신의 심장을 바르샤바로 가지고 가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메모에는 "기침으로 숨이 막힐 것 같으니 제발 내 몸을 노출된 채로 놔두어 주십시오. 내가 산 채로 무덤에 묻히지 않게 말입니다." 쇼팽은 행여라도 살아있는 채 묻힐까 봐 두려웠다.
가장 사랑한 사람이 빠진 쇼팽의 장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