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의 다른 글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최운산·최진동 형제최성주 최운산과 그 형제들의 독립의지는 여전히 불타올랐다. 일찍이 여러 가지 가업을 통해 사업수완을 키웠던 최운산은 여러 방법으로 모금을 하고, 어느 정도 기금이 모이자 중소 국경 부근에 있는 북간도 산림지대에 독립군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편지를 받은 최우삼과 당시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던 부인 김성녀 여사는 땅을 처분하고 군자금을 마련해 연해주로 보냈다. 최운산 장군 형제들은 삼림 지역인 동녕현의 넓은 땅을 사서 '고려촌'이라고 이름 붙이고 군사학교를 세워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훈련을 마친 군인 중 일부는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것은 봉오동 기지처럼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준비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갔다가 언제든 일제와 싸울 때 소집령을 내리면 독립군으로 복귀하도록 하고 다시 돌려보내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주석 5) 노령과 만주의 교민들에게 자유시 참변은 쉽게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였다. 희생된 독립군 중에는 국내에서 건너간 애국청년들이 많았지만, 현지 교민들의 자제들도 상당수 있었다. 해서 최운산 형제들이 열정을 갖고 독립군 부대의 재건에 나섰으나 병력을 모으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최운산 장군은 독립전쟁 중에 사망한 독립군 가족에게는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전달하게 했다. 봉오동에 있는 부인 김성녀 여사에게 사망한 독립군 가족들의 생활비 지원을 부탁하기도 하고 모연활동을 하는 독립군이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주석 6) 이역에서 교민들의 협력이 없이는 독립운동은 불가능했다. 마치 교민과 독립운동가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최운산은 경신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가족을 잃은 동포들에게 많은 관심을 쏟았다. 먼저 봉오동 구토로 돌아간 부인 김성녀가 앞장섰다. 최운산 장군은 경신참변에서 살아남은 동포들을 도울 방법을 생각했다. '삼동'이라는 지역에 땅을 사서 독립군 기지를 만들고 경신참변에서 살아남은 독립군 가족을 이주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독립군들이 땅을 개간하고 독립군 가족들이 와서 농사를 지으면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고 독립군 가족들도 살 곳을 얻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고려촌'과 새로 마련하는 '삼동' 지역에 독립군을 분산시켜 주문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1년의 노력 끝에 삼동 지방의 토지를 구입하고 독립군부대를 옮기고 일제에 의해 집을 잃었던 사람들도 이주를 시작했다. 최진동ㆍ최운산 장군 형제들과 우리 독립군은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다시 처음부터 하나씩 준비해 나갔다. 우리 독립군의 활약이 신문을 통해 국내에 있는 동포들에게 알려지면서 북간도에 있는 독립군은 다시 대한민국 독립의 희망이 되었다. (주석 7) 최운산 형제들의 이와 같은 동포애와 독립군 재기운동은 국내의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독립군 재건에 나선 지 3년여 후 병력이 4천여 명에 대기관총과 대포까지 갖췄다고 한다.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북간도와 아령소련 방면 근처에 근거를 둔 독립당 최진동이 거느린 다수의 부하가 무기를 가지고 그 세력이 매우 굳세다 한다. 중국 관헌 간에서도 매우 염려하고 있다. 동녕현지사가 조사하여 길림성 성장에게 보고한 바에 의하면 최진동의 부하는 4,199명이며 장총이 4,059개이며 기관총이 27개이며 대포가 4개라고 한다. (주석 8) 주석 5> 최성주, 앞의 책, 74쪽. 6> 앞의 책, 75쪽. 7> 앞의 책, 75~76쪽. 8> 『동아일보』, 1924년 1월 14일.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최운산 #최운산장군평전 #무장독립투사_최운산장군 추천5 댓글 스크랩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구독다음 채널구독 10만인클럽 10만인클럽 회원 김삼웅 (solwar) 내방 구독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 처단대상 18개 부류 구독하기 연재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다음글34화형제가 극동민족회의 참석 현재글33화4천여 명 독립군부대 재편성 이전글32화정보력으로 직할부대원 지켜내 추천 연재 윤찬영의 익산 블루스 "꽝" 소리 나더니 도시 쑥대밭... 취재기자들도 넋이 나갔다 꽃보다 소년 5분 지각에 '대외비' 견학 버스는 떠났고 아이는 울었다 김은아의 낭만도시 민박집에서 이런 이불을 덮게 될 줄이야 백화골 팜스테이 ‘한국이 좋아서’ 한식에 빠진 미국 청년, 이걸 다 만들어봤다고? SNS 인기콘텐츠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윤석열·심우정·이원석의 세금도둑질, 그냥 둘 건가 윤 대통령 부부에게도 똑같은 '법의 잣대'를 광화문 나온 이재명 "이재명은 죽지 않는다" [오마이포토] "윤석열을 거부한다" 시민행진 영상뉴스 전체보기 추천 영상뉴스 [단독] 김태열 "명태균이 대표 만든 이준석,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단독] 윤석열 모교 서울대에 "아내에만 충성하는 대통령, 퇴진하라" AD AD AD 인기기사 1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2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3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4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5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Please activate JavaScript for write a comment in LiveRe. 공유하기 닫기 4천여 명 독립군부대 재편성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밴드 메일 URL복사 닫기 닫기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취소 확인 숨기기 이 연재의 다른 글 35화최진동, 레닌에게서 권총선물받아 34화형제가 극동민족회의 참석 33화4천여 명 독립군부대 재편성 32화정보력으로 직할부대원 지켜내 31화'자유시 참변' 독립군끼리 전투 맨위로 연도별 콘텐츠 보기 ohmynews 닫기 검색어 입력폼 검색 삭제 로그인 하기 (로그인 후, 내방을 이용하세요) 전체기사 HOT인기기사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미디어 민족·국제 사는이야기 여행 책동네 특별면 만평·만화 카드뉴스 그래픽뉴스 뉴스지도 영상뉴스 광주전라 대전충청 부산경남 대구경북 인천경기 생나무 페이스북오마이뉴스페이스북 페이스북피클페이스북 시리즈 논쟁 오마이팩트 그룹 지역뉴스펼치기 광주전라 대전충청 부산경남 강원제주 대구경북 인천경기 서울 오마이포토펼치기 뉴스갤러리 스타갤러리 전체갤러리 페이스북오마이포토페이스북 트위터오마이포토트위터 오마이TV펼치기 전체영상 프로그램 쏙쏙뉴스 영상뉴스 오마이TV 유튜브 페이스북오마이TV페이스북 트위터오마이TV트위터 오마이스타펼치기 스페셜 갤러리 스포츠 전체기사 페이스북오마이스타페이스북 트위터오마이스타트위터 카카오스토리오마이스타카카오스토리 10만인클럽펼치기 후원/증액하기 리포트 특강 열린편집국 페이스북10만인클럽페이스북 트위터10만인클럽트위터 오마이뉴스앱오마이뉴스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