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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력으로 직할부대원 지켜내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 32회] 자유시참변으로 많은 부하를 잃고 동포 청년들의 희생을 겪은 최운산은 증오심에 불탔다

등록 2021.02.07 20:57수정 2021.02.07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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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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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 자유시 풍경. 흑룡강 지류인 쩨야강 연안에 위치하며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통과함. ⓒ 독립기념관

 
자유시참변은 독립군의 국치 이래 최대의 참변이었다. 여기에는 이데올로기의 작용도 적지 않았다. 최운산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줄곧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하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과 함께 독립운동 진영에도 사회주의 노선이 급속히 전파되었다. 식민지 해방을 제창하는 레닌의 주장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일종의 복음처럼 인식되었다. 
 
실제로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일제와 싸우는 것은 한 방략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무장인 최운산과 그 형제들은 이념보다 일제타도라는 현실적인 목표에 충실한 편이었다. 더욱이 자유시 참변을 겪으면서 러시아 혁명정부의 일탈된 모습에 실망을 감추기 어려웠다. 
 
최운산은 자유시참변의 격랑속에서 희생된 부대원도 적지 않았지만, 직할 부대원을 지켜냈다. 정세에 관한 적확한 판단과 정보력에서 얻은 성과였다. 
 
첩보를 통해 러시아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음을 간파한 최운산 장군은 러시아를 그대로 믿을 수 없다며 우리 독립군을 빨리 이동시키자고 주장했으나 이동휘와 최진동 장군은 연해주 독립군 지휘부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을 주장했다. 당시 긴장 속에서 서로 감시하는 분위기에서 대군단을 이동시키는 결정을 내릴 수도 없었다. 
 
그러자 최운산 장군은 군자금 모금을 핑계로 자신의 휘하부대만을 데리고 당시 자유시를 떠났다. 그때 살아남은 독립군들이 후일 새로운 독립군 양성에 주축이 되었다. 최운산 장군 형제들은 자유시에서 수많은 병사들을 잃은 상황에서도 새로운 독립군기지 건설에 주력하여 다시 독립군을 양성하여 정세분석과 일본군의 동향 파악 및 비밀 첩보활동을 지속하였다. (최운산「연보」)

최운산 형제들 뿐만 아니었다. 자유시참변에서 살아남은 독립군 부대들은 속속 이만을 떠나 다시 만주나 연해주의 산중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더욱 항일의식에 불타는 교민들의 지원을 받으며 독립군의 재기에 나서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자유시참변 후 북만주로 온 한국독립군들은 그곳에 남아 있던 항일인사들과 힘을 합해 독립군기지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자유시까지 이동하지 않고 1921년 3월 이만에서 북만주로 방향을 돌린 북로군정서 병력은 밀산과 영안현을 중심으로, 국민회군계통의 병력은 돈화와 액목현을 중심으로, 그리고 신민단ㆍ광복단ㆍ한민단 등 여러 독립군단의 독립군들도 각기 영고탑ㆍ목단강ㆍ동녕현 등에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와 같이 북만주 각 지역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고자한 독립군단들은 남북만을 연결하는 교통요지인 돈화ㆍ액목ㆍ안도현을 거점으로 특파대를 파견하여 흩어진 독립군 낙오병들을 모아들였다. 
 
북로군정서와 같이 집단적으로 이만에서 북만주로 이동한 독립군단도 있었으나 자유시참변 후 온 대부분의 독립군 병사들은 흩어져 왔기 때문에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낙오병들 일부는 원소속 독립군단으로 모이기도 했지만 일부는 새로운 주둔지에서 조국 광복의 길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주석 3)

 

최운산 장군 (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연변박물관에 전시된 최운산 장군 초상화. 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역사적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자유시참변으로 많은 부하를 잃고 동포 청년들의 희생을 겪은 최운산은 증오심에 불탔다. 많은 재산을 바쳐 구축했던 봉오동을 떠날 때보다 더 극심한 일제에 대한 증오심이었다.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해서라는 일념으로 고국을 떠나 산 설고 물 설은 이역에서 일제와 싸우다가 어이없게도 동족끼리의 싸움으로 목숨을 잃은 청년들이다. 

최진동ㆍ최운산ㆍ최치홍 형제는 자유시참변과 같은 격변을 겪으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항일 의지를 불태우며 다시 독립군을 결집했다. 연해주와 북만주 곳곳에 사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며 계속해서 항일 투쟁을 이어갔다. 독립군이 안전하게 주둔할 수 있는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삼림 지역의 땅을 다시 사들였다. 이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국내외로 다니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봉오동에 있는 부친 최우삼에게 군자금을 보내달라는 연락을 보내기도 했다. (주석 4)


주석
3> 채영국, 「경신참변 후 독립군의 재기와 항전」, 『한국 독립운동사연구』 제7집, 342쪽, 1993, 독립기념관.
4> 김춘선 외, 『최진동 장군』, 203쪽, 흑룡강 조선민족출판사, 2006.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최운산 #최운산장군평전 #무장독립투사_최운산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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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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