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 뒤 독립군들이 찍은 기념사진북로군정서로 추정되는 독립군 부대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물리친 뒤 촬영한 기념사진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자유시 보병대대와 대한국민의회, 전로고려공산당 등이 독자적인 최고군사기관을 조직하겠다고 나서면서 대한의용군을 인정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이로써 모처럼 태동한 독립군의 통합부대가 되는 '대한의용군'의 조직은 수포로 돌아가고, 독립운동세력끼리 충돌을 빚게 되는 빌미가 되었다.
당시 아무르주의 정치 군사상황은 대단히 복잡 미묘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항일 독립군 부대들은 자유시(알렉셰프스키)로 이동하여 다시 연합부대를 결성하고 일제와 싸우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러시아 원동공화국 제2군단에서 한인 독립군 부대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고 나섰다. 명분은 한인 부대들이 일본제ㆍ러시아제ㆍ체코제 등 다양한 병기로 무장하여 전투에 효율성이 떨어지므로, 이를 회수하여 러시아제로 일괄하여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군인에게 무기는 생명과 같은 것으로 많은 병사들이 의구심을 제기하면서 선뜻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지도자는 고심 끝에 이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러시아 혁명정부가 자신들을 속일 리 없을 것이란 믿음때문이었다.
1921년 6월 28일 노령 자유시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프카에 주둔한 한인부대인 사할린의용대를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자유대대)가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양측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된 이 사건은 외견상 무장해제 과정이지만 배경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주도권을 둘러싼 파쟁이 불러일으킨, 한국무장독립운동사상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사할린의용대는 이만에서 트라피친의 적색 빨치산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한 한인부대로서, 이들이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자유시로 들어왔을 때, 당시 자유시에는 자유대대 외에도 많은 독립군부대가 집결하고 있었다. 사할린의용대의 실력자 박이리아는 자유대대의 오하묵ㆍ최고려 등과 군통수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게 되었다.
자유대대는 원래 대한국민의회 휘하의 무장부대였다가 러시아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제2군단에 편입된 한인부대이며, 대한국민의회는 상해임시정부와 이동휘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대해 비판적인 이르쿠츠크파계였다.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대에는 상해파의 이동휘계 인물인 박애ㆍ장도정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박이리아는 군통수권 장악을 위해 이르쿠츠크파와 반목하는 상해파와 손을 잡고, 휘하부대와 간도에서 온 독립군부대를 자유시 근처의 마사노프로 이동시켰다.
그러한 가운데 군통수권 투쟁에서 박아리아가 일단 승리하여 전군에 군림하였기 때문에, 그의 지휘 아래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치타로 떠나간 6인 대표의 최종보고를 기다리고 있던 중에 오하묵이 임시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고 하므로 어쨌든 만나보아야 할 일이었다. 당시 이청천은 크게 실망하여 간도로 되돌아가는 도중에 블라고베시첸스크에 체류중이었으므로 오하묵과 이 회합에 동석하지 않았다.
코민테른동양비서부는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기 위해 고려공산혁명군정의회를 결성, 적군 빨치산 영웅 갈란다라시월린을 의장 겸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군통수권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설득에 실패한 갈란다라시월린은 29연대를 동원, 6월 28일 수라예프카로 이동해 있던 사할린의용대에 대해 무장해제를 단행했고 이때 자유대대도 각 연대와 함께 행동했다. 두 세력의 충돌로써 빚게 된 당시의 희생자수는 자료마다 서로 다른데, 「재로고려 혁명군대 연역」에는 사망 36명, 포로 864명, 행방불명 59명으로, 「간도지방 한국독립단의 성토문」에는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불명 250명, 포로 917명으로 되어 있다.
충돌 후 고려군정의회는 포로심사를 거쳐 일부는 수감하고 나머지는 이르쿠츠크로 이동시켰으며, 다른 무장부대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적군 제5군단 산하 1개 여단으로 편성되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파쟁이 빚어낸 비극으로, 무고한 다수의 독립군 대원들이 희생당하고, 이후의 한국 공산주의운동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세칭 '자유시 참변'은 한국혁명운동사상에 너무나 불행한 참변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은 한국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 적군에게 당한 일대 참변이었으나, 더 근본적으로는 이른바 이르쿠츠크파 대 상해파 사이의 대립 투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배경은 너무나 복잡하다.
레닌정부, 코민테른, 극동공화국정부 및 볼셰비키 현지당들이 한인의 역량을 총체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한인독립운동세력의 민족파, 준공산파 내지 공산파와 모두 적당한 관련을 맺어오다가 일정한 단계에 이르러 그 모순이 폭발되고 만 것이다. 자유시 참변은 바로 그 대표적인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석 2)
주석
1> 『중국 동북지역 독립운동사』, 447쪽.
2> 김준엽ㆍ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1), 302쪽, 청계 연구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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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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