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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은 언제까지 '일등 땔감' 자리 지켰을까

군산 주민들의 삶과 문화, 역사가 느껴지는 흔적들⑫

등록 2021.03.03 09:50수정 2021.03.0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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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경포(서래포구), 죽성포(째보선창), 옹기전, 공설시장(구시장), 역전새벽시장(도깨비시장), 팔마재쌀시장, 감독(감도가), 약전골목, 농방골목, 모시전 거리, 싸전거리, 객주거리, 주막거리 등이 있었다. 그러나 격동의 세월을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지역 주민의 삶과 문화, 역사가 오롯이 느껴지는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겨본다.[기자말]
한반도는 해방(1945) 이후 미군정이 들어서는 그해 10월까지 약 두 달 동안 정치적 공백기였다. 또 미군정 시행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1948년 8월까지 군정 3년은 가히 무질서한 과도기였다. 특히 군산 지역은 물가 폭등으로 세궁민은 늘어만 갔고, 좌우익 대립으로 인한 피해자가 속출하는 등 각종 난맥상이 드러나고 있었다.

해방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 지 3년. 군산의 서민층은 살림다운 살림살이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굶주리며 지내야 했다. 매서운 바닷바람을 동반한 한겨울 추위는 그들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마다 찾아왔다. <군산신문>(1947년 12월 4일)은 '헐벗은 우리의 가정은 오늘도 끼니때마다 한 다발의 장작과 한 됫박의 쌀로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고 전하였다.


광복 후 군산 부둣가 장작거리 풍경
   
장작은 광복 후에도 '일등 땔감'으로 대접받는다. 도벌꾼들은 호기를 틈타 산야를 누비고 다녔다. 나무장수들이 장작을 우마차에 싣고 다니는 모습이 시내에서도 자주 눈에 띄었다. 중앙과 지방 신문의 물가 시세표에도 자주 등장한다. 가난과 고물가 속에서도 사람들은 월동 준비를 서둘렀고, 부둣가(째보선창)에는 만재한 장작배가 속속 들어왔다.
 
 1948년 12월 10일 치 <群山新聞(군산신문)> 기사
1948년 12월 10일 치 <群山新聞(군산신문)> 기사군산신문
 
"'사리때'를 이용하야 만재(滿載)한 '장작선(長적船)'이 찬바람 유달리 흐느껴주는 부둣가(埠頭街)에 속속(續續) 대폭적(大幅的)으로 입하(入荷)되야 그의 시세(時勢)도 폭락일로(暴落一路)에 놓여 있을뿐더러 월동준비(越冬準備)를 하지 못하고 추움에 떨든 가난한 살림살이 갖인 자(者)에게 다소(多少)의 안도감(安堵感)을 주고 있다. (아래 줄임)"-(1948년 12월 10일 치 '군산신문')
 

신문은 "한때 교통 두절로 장작이 고갈되어 한 평(坪)에 7000원 이상의 불등(폭등)을 보게 되어 월동준비를 미처 하지 못하였던 군산은 (추위에) 떨고 우는 비참한 그림을 그려주었는데 요즘 교통이 완화되어 해상으로는 부안 변산반도를 중심으로 고창, 충남 안면도 등지에서 육상으로는 남원, 진안, 고산 등지에서 끊일 새 없이 입하되고 있다"고 덧붙인다.

해상과 육상으로 장작이 들어오자 한 평에 7300원까지 치솟았던 장작 시세는 5700원으로 예전 가격을 회복하게 된다. 또한 나무껍질 하나 뒹굴어 다니지 않았던 부둣가(째보선창)는 눈길이 멈추는 도처에 30단, 50단, 100단씩 쌓아놓은 장작더미가 산적되어 선창을 찾는 사람들이 번잡한 골목길을 걸어가는 착각에 빠지게 하였다.

취사와 온돌보온 겸할 수 있는 '신탄절약기' 발명
 
 1948년 12월 1일 치 <群山新聞(군산신문)> 광고
1948년 12월 1일 치 <群山新聞(군산신문)> 광고군산신문
 
해마다 연료난을 겪어야 했던 해방정국 시기. '장적(장작) 7할 절약'이란 문구를 강조한 '신탄절약기(薪炭節約器)' 광고(1948년 12월 1일 '군산신문')가 눈길을 끈다. 광고주는 군산시 중앙로 1가에 본점을 둔 '진기준 신탄절약기상사(陳基俊 薪炭節約器商社)'로 제목을 풀이하면 '혁신적 위대한 발명품, 신탄절약기 드디어 출현' 쯤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발명품은 온돌용과 취사용(화로) 두 종류로 모두 전매특허품(발명공결 제 126호, 등록출원 제 127호 등록출원 167호)임을 내세우고 있다.

광고는 '신탄절약기' 성능과 특징, 장점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장점으로는 ▲ 연료 소요량이 예전의 장작에 비해 70% 절약되며 ▲ 발명품 하나로 취사와 온돌보온 겸할 수 있다. ▲ 온돌, 보온 대속(待續) 시간이 장작 소비량보다 고온이며 열(熱)도 장시간 지속되고 ▲ 취사 소요 시간이 예전의 장작 소비와 비교해 단축되는 점 등을 들었다.


특징은 재래식 아궁이와 온돌을 개조하지 않고 그대로 비치(備置)하여 사용할 수 있고, 취사실(부엌)의 광대함이 불필요하며 항상 명랑 청결하다는 것. 특히 협소한 주택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고, 장작에 불붙이기가 아주 쉬우며, 발명품 하나로 취사 일식(一式) 취반, 취국, 탕수(湯水), 로어육(爐魚肉) 철질, 탕약 등이 연속적으로 달하게 된다고 소개한다.

광고 마지막에 "수요자 제위께서 실제 사용한 결과 본 광고와 상반될 시에는 하시든지 본사에서 반환(返還)에 응(應)하겠다"라고 약속했는데, 훗날 소비자들에게 알뜰 제품으로 인정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당시 사람들이 땔감 문제로 얼마나 고민하고 연구했는지 추정할 수 있는 귀한 자료로 여겨진다.


시간여행 떠나게 하는 50년대 '장작가게' 모습
 
 존콘스 박사가 찍은 군산의 장작가게 모습(1955년 전후로 추정됨)
존콘스 박사가 찍은 군산의 장작가게 모습(1955년 전후로 추정됨)군산시
 
영국인 의사 존 콘스 박사가 군산 도립병원에서 의료봉사할 때(1954~1956) 찍은 컬러사진이다. 콘트라스트가 강해서 그런지, 환갑을 훌쩍 넘긴 옛날 사진임에도 최근에 촬영한 것처럼 선명하다. 위치는 지금의 공설시장(구시장) 서문 입구로 추정된다. 원본에는 2층 건물에 행인, 노점상 등이 담겨 있으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장작가게 부분만 트리밍하였다.

사진이 찍힌 1950년대 중반, 당시 군산은 콘스 박사가 의료봉사 활동을 펼쳤던 도립병원을 비롯해 많은 건물과 시설물이 파괴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내항 철조망 부근에는 한 칸짜리 판잣집이 빽빽하게 들어섰고, 공설시장 부근에도 피난민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처럼 전쟁의 상흔이 아물지 않았던 시대였음에도 사진에서 활기가 느껴진다.

처마보다 높게 쌓아놓은 장작더미가 고향의 정취를 물씬 자아낸다. 장작 특유의 은은한 나무향이 실제 풍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코흘리개 시절 헛간이 딸린 부엌과 장작가게 앞을 지나칠 때마다 맡았던 그 냄새다. 누비저고리 차림의 아낙과 대화하는 아저씨, 누군가에게 손가락질하며 말을 건네는 어린아이 등 등장인물들이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구공탄과 석유에 '일등 땔감' 자리 내줘
 
 난로용 장작을 쌓아놓은 모습
난로용 장작을 쌓아놓은 모습조종안
 
장작은 한국전쟁 후에도 소비가 해마다 증가했다. 장작을 1톤짜리 쓰리쿼터에 가득 싣고 팔러 다니는 행상도 있었다. 그들은 "바싹 마른 참나무 장작 사려! 소나무 장작도 있어요!" 하고 외치고 다녔다. 그 외치는 소리에 아낙들이 뛰어나와 몇 단씩 사들이곤 했다. '연탄을 때야지 장작을 때니 산에 나무가 남아날 수가 없지!'라며 탄식하는 아저씨도 있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정부 주도로 연탄 온돌을 처음 개발했으나 장작 소비는 줄지 않았다. 장작거리와 기차역 등에 상주하면서 장작을 패주는 도끼꾼과 장작을 운반해주고 운임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구루마꾼이 많았던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인심 넉넉한 주인 만나면 팁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운임과 품삯 경쟁이 일어날 정도로 일꾼이 많았다.

연탄이 새로운 연료로 부각되면서 중앙일간지 '오늘의 물가' 시세표에 구공탄과 함께 등장했던 장작은 1960년을 기점으로 신문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도벌꾼들의 도벌과 남벌은 그치지 않았다. 1961년 12월 군사정부가 산림법을 제정 공포하고 강력히 단속하면서 도벌은 자취를 감췄으나 몇 년 뒤 몇몇 지역에서 다시 나타났다.

장작은 6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소비가 줄기 시작한다. 이후 거리 어디서나 쉽게 구경할 수 있었던 장작시장의 떠들썩한 광경도, 뒷산에서 나무를 해오던 나무꾼 모습도, 부엌 아궁이에 장작 지피며 담소 나누던 아낙들 이야기판도 볼 수 없게 된다. 해마다 가을이면 주부들 가슴을 조이게 했던 장작 역시 구공탄과 석유에 '일등 땔감'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잔칫집 아궁이에 군불 지피며 담소 나누는 시골아주머니들(2012년 찍음)
잔칫집 아궁이에 군불 지피며 담소 나누는 시골아주머니들(2012년 찍음)조종안
 
참고문헌: 동아일보, 경향신문

(*다음 기사에 계속됩니다.)
#장작 #군산 째보선창 #신탄절약기 #장작거리 #일등 땔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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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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