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성취하는 것은 창업보다 수성이다

이것이 중국인이다 7

등록 2021.05.17 09:43수정 2021.05.17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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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공신들은 숙청당하게 마련이다

중국 역사상 무수한 왕조가 일어나 흥망을 거듭했지만 대개의 경우 왕조를 이룩한 왕들은 창업공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그것은 창업보다 수성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이다.

창업주로서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가장 유명한 이는 한(漢)나라를 일으킨 한 고조 유방을 들 수 있다. 유방은 권좌에 오르자 한 왕조 건설에 공이 큰 장수와 부하를 제후왕과 열후로 각지에 봉했으나, 한신(韓信), 팽월, 영포, 장오 등의 공신 제후들을 모두 처형하고 만다. 그들은 모두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특별한 죄도 없었지만 모반죄를 덮어 쓰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자신은 물론 자신의 사후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모두 제거하기 위한 피의 숙청이었다. 그 후 한나라의 왕은 '유씨 일족'에 한정된다는 불문율이 성립되었다.
유방이 그처럼 무자비하게 자신을 도운 공신들을 제거해 나간 데는 자신이 무너뜨린 진나라가 진시황이 죽은 후, 불과 15년 만에 무너진 것을 보고 왕조의 수성과 백년대계를 위해서 극단적인 숙청을 감행했던 것이다. 

토사구팽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사냥터에서 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는 필요 없으니 잡아먹는다는 말인데,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건설하는 데 혁혁한 공훈을 세운 한신이 처형을 당하면서 남긴 유명한 말이다.

한신은 소하(蕭河), 장량(張良)·과 더불어 한나라 창업 삼걸의 한 사람이라서 누구도 그가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방은 자신의 왕조를 위협하게 될 여지가 있는 세력은 가차 없이 제거해나가는 냉정함과 무자비함을 보여주었다.


초왕(楚王)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유방은 한신을 초왕(楚王)에 책봉했다.
그러나 유방은 한신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도전할 것을 염려하고 있었는데, 마침 항우의 맹장이었던 종리매(鍾離昧)가 옛 친구인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찍이 전투에서 종리매에게 괴로움을 당했던 유방은 지난날 종리매에게 고전한 악몽이 되살아나 크게 진노했다. 유방은 한신에게 당장 종리매를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한신은 차마 옛 친구를 배반할 수 없어 그 명령을 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고조에게 '한신은 반심을 품고 있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유방은 즉시 한신의 입궐을 명했고, 명을 받은 한신은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래서 '아예 반기를 들까'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죄가 없는 이상 별 일 없을 것'으로 믿고 순순히 유방을 배알하기로 했다. 그러자 한신의 책사 괴통이 속삭였다.

"종리매의 목을 베어 배알하시면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한신이 이 이야기를 하자 종리매는 크게 노했다.

"지금 유방이 초나라를 치지 않는 것은 자네 곁에 내가 있기 때문일세. 그런데도 자네가 내 목을 가지고 고조에게 가겠다면 당장 내 손으로 잘라 주지. 그런데 자네가 나를 죽여 유방에게 바친다면 자네도 얼마 안 가서 당할 것일세. 자네의 생각이 그 정도라니 내가 정말 잘못 보았네. 자네는 군왕이 될 그릇은 아니로군."

종리매가 자결하자 한신은 그 목을 가지고 유방에게 바쳤다. 하지만 유방은 한신을 포박하게 했다. 역적으로 몰려 묶인 몸이 된 한신은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과연 전해오는 말이 맞도다. 날랜 토끼를 잡으면 사냥하던 개는 소용이 없어 삶아 먹고(狡兎死, 走狗烹), 하늘을 나는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은 곳간에 처박히며(高鳥盡, 良弓藏).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지혜 있는 신하는 버림을 받는다.(敵國破謀臣亡)더니 한나라를 세우기 위해 온몸을 바친 내가 유방에게 죽게 되었구나.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나도 개처럼 삶겨질 운명이었어!"

만약 한신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 모른다. 그러나 한신은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전쟁에서는 반드시 이겨서 공을 세우는 뛰어난 장수였기 때문에 유방은 그의 능력이 두려웠던 것이다. 

한신은 유씨가 아닌 왕들을 사전에 제거하여 유씨 천하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려고 한 유방의 계책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었으며, 한신은 그러한 유방의 각본에 맞추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만 했다.
  
창업보다 수성을 더 잘한 비범한 범인

그런데 송(宋)나라를 일으킨 조광윤은 좀 달랐다. 그는 왕조를 창업하는데도 유방이나 명(明)나라를 일으킨 주원장처럼 힘을 들이지 않았지만 왕권을 유지하는데도 무력보다는 평화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그는 처음 후주(後周)의 세종 밑에서 금군(禁軍)의 장이 되었고, 거란, 남당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금군총사령이 되었다. 세종의 사후 북한(北漢)침입의 위기를 당하여 근위병(近衛兵)들의 옹립으로 제위에 올랐다.

황제의 자리에 올라 곤룡포를 몸에 두른 조광윤은 고민에 빠졌다. 자기 부하들도 자기처럼 정변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 원인은 각 지방에서 할거하고 있는 절도사들 때문이었다. 그들의 군사권을 그대로 방치해두었다가는 언제 반란이 일어나서 내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지 모르고 자기 또한 언제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그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고민에 잠겼다.

어느 날 그는 재상 조보을 불러서 물었다.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앞날을 기약할 수가 없구려. 천하의 병권을 잡아서 사직을 공고히 하고 국가의 천년대계를 세우고자 하는데 좋은 방법이 없겠소?"

"그러기 위해서는 절도사들의 병권을 빼앗아야 합니다. 당나라 말부터 5대에 이르기까지 제왕이 빈번히 교체된 것은 절도사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천하는 저절로 태평하게 될 것입니다."

조광윤은 그 말에 동감을 표하고 조보에게 그 실천 방법을 물었다.

"우선 근위군을 개편하고 개국 공신들이 쥐고 있던 군권을 빼앗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조광윤은 곧바로 그 방책을 실행에 옮겼는데 그 실천방법이 그다웠다. 그것은 역대의 어떤 황제들도 행사하지 못했던 파격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솔직하고 담백한 태도로 본심을 털어 놓았다.

"만약 그대들이 나를 추대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오늘의 내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나는 천자의 자리가 절도사보다 훨씬 못한 것 같소. 이 자리는 편치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자리오. 요즘 나는 밥을 먹을 때도, 잠자리에 들 때도 불안하오."

조광윤의 이 말에 부하들은 깜짝 놀라 그 까닭을 물었다.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천명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감히 누가 딴 마음을 먹는단 말입니까?"

그러자 조광윤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들의 충성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요. 하지만 부하들이 부와 자리가 탐이 나서 그대들을 황제의 자리에 앉히고 어느 날 갑자기 그대들의 몸에 곤룡포를 두르게 할할 때, 누가 거절할 수 있겠소?"

그러자 부하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희들이 어리석어 그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저희들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앞으로 나갈 길을 열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조광윤은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인생은 짧다. 그대들이 병권을 내놓으면 짐은 그대들에게 좋은 땅과 아름다운 거처를 주어 여생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겠소. 많은 재산을 자손에게 물려준 후 노래와 춤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또 우리 군신 간의 의심을 없애고 서로 편하게 지내는 것이 한결 좋지 않겠는가?"

부하들은 황제가 불안과 투쟁의 삶 대신에 부와 안전이 보장되는 삶을 제안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다음날 측근 부하들은 모두 사직하고, 귀족이 되어 황제가 주는 땅으로 물러났다.

이른바 "술잔을 돌리며 병권을 풀어놓았다"는 '배주석병권'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봉건 사유제 아래에서 행한 조광윤의 이러한 방책은 상당히 옳고 효과를 거둔 확실한 방책이었다.

만약 절도사들의 권한을 박탈하기 위해서 강권을 발동했더라면 그도 누구 못지않은 피를 흘려야만 했을 것이다. 조광윤의 그 조치는 조씨 정권을 공고히 해서 군벌이 여기저기서 날뛰는 혼란한 국면에 종지부를 찍은, 확실히 적절한 책략이었다.

조광윤은 창업 단계에서 이처럼 비교적 뛰어난 정치적 견해와 행동을 보여줌으로서 부하들의 항복을 받아냈고 결국 송나라 300년의 탄탄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절도사 지배체제를 폐지, 중앙에 민정 ·병정 ·재정의 3권을 집중하고 금군을 강화하여 황제의 독재권을 강화했다. 지방통치를 위해 전국에 파견되는 관료의 채용을 위한 과거제도를 정비하고 최종시험을 황제 스스로 실시하는 전시(殿試) 또는 어시(御試)를 시작함으로서 무인정치를 폐하고 문치주의에 의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확립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송나라는 마침내 유혈 쿠데타의 악순환을 끊었으며, 이후 삼백 년 이상 중국을 다스렸다.

만일 유방이 조광윤과 같은 아량을 부하들에게 베풀 수 있었다면 한신의 토사구팽 갗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이것이 중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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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소설가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당선 문학과 창작 소설 당선 2017년 한국시문학상 수상 시집 <아님슈타인의 시>, <모르는 곳으로>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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