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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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을 비롯하여 후계자와 신도들의 바람과 소망은 교조의 억울한 죽임에 대한 신원(伸寃)과 동학의 공인이었다. 고종 정부는 한때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까지 동원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다가 1886년 5월 3일을 기해 기독교와 천주교의 선교사업을 공식적으로 허용하였다.
그러나 동학에 대해서는 여전히 금압정책을 폈으나 최시형의 적극적인 포교활동으로 교세는 강원ㆍ충청ㆍ경기ㆍ황해지역으로 확산되고, 지역책임자(접주)의 주도 아래 탄탄한 조직이 갖춰졌다.
한국 사회는 고대로부터 억울한 죽음으로 귀천을 하지 못한 혼령의 한을 풀어주는 일은 생자들의 과제였다. 망자의 넋을 씻김으로써 그 넋이 저승으로 갈 수 있도록 하는 무속의 씻김굿이나, 증산교의 해원사상(解寃思想)은 원한을 풀어줌으로써 혼령이 하늘나라에 이르게 한다는 염원이었다.
최시형은 1890년과 1891년 동학의 근간조직을 확고히 하는 한편 교세를 더욱 확장하기 위하여 손병희를 비롯하여 그의 동생 손병흠 등 제자들과 함께 충청도 충주ㆍ공주와 강원도, 양구ㆍ간성ㆍ인제, 다시 충청도 태인, 전라도 부안ㆍ전주 등 3도를 순방하면서 도민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가는 곳마다 도인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이 찾아와 속속 입도함으로써 교세가 크게 신장되었다.
1892년 7월 동학의 리더급이던 서인주ㆍ서병학이 상주 공성면 왕실(旺實)에 머물던 최시형을 찾아와 교조신원의 시급성을 주장하였다. 최시형은 자신도 선사의 해원이 무엇보다 더 간절한 소원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일이 순조롭게 되기 어렵다"라고 이들을 설득하였다.
해월도 그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추수기를 앞두고 일을 벌이는 것은 농사를 망치는 일이 되므로 가을에 가서 기회를 보자는 뜻에서 시기가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일이 순조롭게 되기 어렵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해월은 10월 중순께 지도자급을 불러서 교조신원운동을 협의하였다. 1차는 공주에서 충청감사를 상대로 하고 2차는 삼례에서 전라감사를 상대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