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를 방어하는 중국군 진지(1937년)중국 국민당 정부는 일본군의 예상보다 격렬하게 침략에 저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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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접수한 것은 아시아에서 식민지를 경영하던 열강들에 있어 크나큰 위협으로 간주됐다. 이미 중일전쟁으로 중국의 소비시장과 각종 이권들을 위협받고 있던 상황에서, 계속되는 일본의 침략 팽창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미국에서는 일본으로의 석유 및 철강 수출을 제한하고 국내 일본 자산을 동결하는 초강수를 뒀으니, 그것이 바로 1941년 8월의 일이었다.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물자 수급이 순식간에 막혀버려 패닉 상태에 빠진 일본을 향해 미국은 중일전쟁의 종결을 과감하게 요구했다. 금수조치가 풀리지 않는 이상 중일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금수조치를 풀기 위해서는 중국에서 철군해야 하는 이 딜레마가 제국 일본의 지도자들에게 도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답을 찾기 위해 방황하던 그들은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타개책을 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한 새로운 전쟁의 개전이었다.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대장은 미국의 금수조치 이후 중일전쟁의 종결이 의제로 떠오르자 "중국에서 육군을 철군시키면 완전히 흐트러져 통제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중신들을 위협했다. '육군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는 발언은 육군에 의한 정변의 가능성을 내비치는 것이었다. 이미 2.26사건과 같은 군사정변의 선례가 있던 상황에서, 이 같은 위협은 전혀 허언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내각의 승인 없이 일선 부대의 자의적 발포로 시작됐던 중일전쟁은 육군 세력의 승승장구를 보장하는 '철밥통'과도 같았다. 그 철밥통을 지키기 위해 이미 상당한 출혈을 감내했던 당시의 시점에서 육군은 미국의 요구대로 중국에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러한 굴욕적 요구를 내걸었던 미국을 응징해 힘으로 금수조치를 풀어야 한다는 발상이 육군 내에 팽배해졌다. 중일전쟁 계속에 대한 육군의 집착은 나라 전체의 국운을 뒤흔들게 됐다.
해군의 셈법은 다소 복잡했다. 개전 계획이 엉성하며 현실성 없다는 지적도 해군 내에서 많았지만, 정작 해군 군령부총장 나가노 오사미(永野修身) 대장은 쇼와 천황에게 개전 찬성의 뜻을 상주했다. 개전에 찬성한 이유에 대해, 나가노 대장은 '해군이 전쟁에 반대하면 육군과 우익이 내란을 일으킬 것'이라며 '어차피 해야 하는 전쟁이라면 조금이라도 유리한 시기에 시작해야한다'는 변을 측근에게 남겼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해군은 해군대로 새롭게 시작될 전쟁을 통해 자신들의 보신책을 강구하고자 했다. 지상전이 중심이 된 기존의 중일전쟁에서 해군이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해군은 정책의 중심에서 육군에 밀려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바다가 주전장이 될 새로운 전쟁은, 해군의 주가를 올릴 좋은 기회였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1941년, 해군에 배정된 예산은 전년도의 두배로 껑충 뛰어올랐다. 해군군령부와 정치계를 분주히 오가던 해군 과격파들은, '미국에 최대한 타격을 입혀 최대한 빠르게 전쟁을 끝내면 된다'는 안일한 사고방식으로 전쟁 개시를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그들에게 전쟁은 기회였다.
한번도 고려되지 않은 '국민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