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명 기념비나비 모양으로 조성한 화단에 기념비가 서 있고, 그 뒤에 석주명 선생의 흉상이 돌 받침대 위에 놓여졌다.
황의봉
석주명 선생의 유적지를 보러왔다가 뜻밖에도 옛 추억을 되살리게 됐다. 1980년대 중반 <과학동아>라는 잡지가 창간되는 바람에 부서를 옮겨 몇 년간 과학 기사를 쓸 기회가 있었다. 그때 세 차례 정도 제주도 출장을 와서 주로 제주도의 자연과 기후, 한라산의 식물생태 등을 취재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에 접속해 옛날에 썼던 기사들을 검색해봤다. 아열대연구소 관련 기사는 86년 4월호에 게재된 '제주도의 열대과일, 어떻게 기르고 있나'라는 제목으로 7장의 사진과 함께 4페이지로 편집돼 있었다.
밤늦게까지 옛 기사를 검색해 읽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내친김에 석주명이란 인물을 검색해보니 제주도와 관련된 많은 업적을 남겼음을 알게 됐다. 수국 보러 갔다가 석주명을 찾게 됐고, 다시 30여 년 전의 나를 만났으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다. 깊어가는 밤, 다시 인터넷을 켜고 '석주명 평전'을 주문하고서야 잠을 청했다.
서점에 주문한 석주명 평전이 도착했다. 책을 펴자마자 그의 드라마틱한 생애에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갔다. 석주명이 서귀포에 머문 것은 1943년 4월부터 45년 5월까지였다.
실력으로 일본인을 누른 석주명
1942년, 모교인 개성의 송도고보에서 박물 교사로 근무하던 그는 11년의 교단생활을 정리하고 경성제대 의학부 생약연구소 촉탁으로 들어간다. 그의 나이 34세 때였다. 나비 연구에 몰두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신설된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현 제주대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에 자청하여 전근하게 된다.
제주도 지역의 나비연구가 주목적이었지만 석주명은 부임하자마자 제주도 방언 수집에 나설 정도로 열정적인 제주 생활을 시작했다. 25개월의 서귀포 근무시기에 그가 남긴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나비 연구뿐만 아니라 '제주도 방언집', '제주도 수필: 제주도의 자연과 인문', '제주도 곤충상' 등 제주도총서 6권이 이 시기의 연구결과였다. 이런 연유로 석주명은 제주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석주명은 해방 직전인 1945년 5월 제주도를 떠나 수원 농사시험장의 병리 곤충학부장으로, 1946년에는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연구부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평생의 과업인 나비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언론 기고와 국제어 에스페란토 보급, 한국산악회 학술조사 등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다.
특히 석주명은 에스페란토로 논문을 써서 외국학자와 교류한 것은 물론, 에스페란토 교과서와 소사전을 집필해 보급했고, 숱한 강습회를 통해 1930~1940년대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을 주도했다.
석주명의 나비 연구는 개성 송도고보를 졸업한 뒤 가고시마 농림전문학교 박물과(생물과) 졸업을 앞둔 무렵, 그의 학자적 자질을 알아챈 은사의 권유로 시작됐다. "한 분야에 10년간 집중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지도교수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박물 교사 시절 그는 전국 산하를 돌아다니며 무려 75만 마리의 나비표본을 만들었다. 한반도 지도에 그가 나비를 채집한 곳을 빨간 점으로 표시해놓은 걸 보면 빈 곳이 없을 정도로 새빨갛다. 석주명은 엄청난 나비표본을 계통 분류하여 같은 종이면서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 844개를 퇴출시키고, 한국의 나비를 248종으로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