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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저격한 의열단원 류시태 무덤, 찾았다

경북 군위군 야산 위치, 비석에 '시태지묘'라 적혀... 상훈법 개정 없이 서훈 불가

등록 2021.10.20 07:17수정 2021.10.21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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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 10월 21일 오전 9시 55분]
 
 의열단원 류시태가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을 뒤에서 저격하려는 당시 모습.
의열단원 류시태가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을 뒤에서 저격하려는 당시 모습.자료사진
 
"아마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지난 9월 초 기자가 영화 <밀정>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진 의열단원 김시현의 묘를 경북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일대 야산에서 찾은 뒤, 그와 함께 활동했던 의열단원 류시태의 묘도 찾겠다고 밝혔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 류시태는 일제강점기 내내 김시현과 마찬가지로 의열단원으로 활동했지만 한국전쟁 중인 1952년 6월 부산에서 일으킨 이승만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으로 인해 현재까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그가 어떤 활동을 했고 어떻게 사망했는지 등 기본적인 정보조차 민관 어디에서도 취합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따져보자는 생각으로 그의 삶을 역으로 추적했다. 이를 바탕으로 경북 지역내 독립운동관련 정보를 취합하고 알리는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의 확인을 거쳐 "경북 안동 출신 류시태가 1965년 군위에서 사망했다"라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기자는 바로 경상북도청과 군위군에 "독립운동가 류시태 선생과 관련된 정보가 있느냐"고 문의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온 답은 김시현 선생 때와 같았다. 

"서훈 받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행적은 알 수도 없고 확인할 의무도 없다." 

'역시 못 찾는 건가'라고 생각하며 포기하려는 찰나, 군위읍행정복지센터의 한 직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도움 될지 판단이 서진 않지만 류시태 선생이 '풍산류씨'라면 같은 집안으로 추정되는 서애 류성룡 선생의 조부 묘가 군위 일대 야산에 모셔졌다"라고 설명했다.


의열단원 류시태 묘, 찾았다
 
 의열단원 류시태의 묘. 경북 군위군 군위읍 야산에 자리해 있다.
의열단원 류시태의 묘. 경북 군위군 군위읍 야산에 자리해 있다.김종훈
  
 의열단원 류시태의 묘. 경북 군위군 군위읍 야산에 자리해 있다.
의열단원 류시태의 묘. 경북 군위군 군위읍 야산에 자리해 있다.김종훈
 
지난 14일, 기자는 경상북도 군위군 외량리 일대에 자리한 서애 류성룡 선생 조부의 묘를 무작정 찾아 나섰다. 막막했지만, 그곳에 가면 의열단원 류시태와 관련된 정보를 무엇이든 얻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2017년 류시태 선생의 동지 김시현 선생의 묘를 찾아 '묘비가 없다'는 사실을 온라인 상에 알린 홍순두 충북교육청 장학관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기자에게 "류시태 선생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형이자 풍기군수를 지낸 겸암 류운룡 선생의 후손"이라면서 "풍산류씨 후손들에게도 확인해 보니 류시태 선생의 자손들은 외국에 거주하지만 류성룡 선생 조부 묘 인근에 류시태 선생의 묘가 모셔진 게 맞다"라고 말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외량리 산 10번지에서 수풀을 헤치고 모기에 뜯기며 수시간 동안 헤매다가 '후암의사 풍산류공 시태지묘(后菴義士 豐山柳公 時泰之墓)'라고 새겨진 작은 비석을 품은 의열단원 류시태의 묘를 발견했다. 1965년 2월 17일 일흔다섯의 나이로 사망한 류시태의 묘가 처음으로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고생 끝에 찾은 의열단원 류시태의 묘는 초라했다. 10월 중순임에도 떼 하나 제대로 서지 않아 메말라버린 흙이 내려앉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선생에게 약식이나마 인사를 올린 뒤 미리 준비한 종이컵에 술 두 잔을 가득 담아 무덤 앞 작은 비석 위에 올렸다. 바로 옆에 의열단원 김시현 선생의 사진도 함께 놓았다. 두 사람은 거사 전날인 1952년 6월 24일 저녁 부산 영도의 하숙집 근처에 모여 마지막 술잔을 함께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69년이 지났지만 이렇게라도 다시 한번 두 사람이 함께 술잔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싶었다.

고향이 같은 김시현과 류시태는 일제강점기 내내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다. 김시현이 1883년에 태어났고, 류시태가 7년 뒤인 1890년에 태어났다. 두 사람 모두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 일제강점기 내내 일제에 맞서 목숨 걸고 싸웠다. 김시현은 1945년 광복까지 26년 동안 독립운동을 이어가며 일곱 차례나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무려 16년을 감옥에서 보냈다(관련 기사 : 묘비도 없는 '밀정' 주인공 김시현 묘... 그는 왜 서훈 못 받았나 http://omn.kr/1v479).

<독립운동사료집>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류시태 역시 1919년 3.1운동 때 독립운동에 투신한 뒤 1921년 의열단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23년 2월에는 동지들과 함께 의병투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서울 내자동에 살던 부호 이인희에게 찾아가 5000원을 요구하는 등 세 차례에 걸쳐 독립자금 출연을 강요하다 잠복중이던 일본경찰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 일로 류시태는 1923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1931년에는 일제를 비장한 죄로 다시 잡혀 1년간 복역했다. 이후엔 일제강점기 당시 선생과 관련된 특별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해방 후에도 의열단원들과의 활동을 꾸준히 이어간 것으로 볼 때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독립운동의 끈을 놓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통령 이승만을 저격하려 한 이유
 
 류시태 관련 조선일보 기사
류시태 관련 조선일보 기사김종훈
 
 류시태 관련 조선일보 기사
류시태 관련 조선일보 기사김종훈
 

1952년 6월 25일, 62세의 류시태는 70세의 김시현과 함께 훗날 '대통령 암살 음모사건'으로 불리는 일을 실행한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임시수도였던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열린 '6·25 2주년 기념 및 북진촉구 시민대회'에서 연설을 진행하고 있었다. 단상 귀빈석에 앉아 있던 류시태는 이 대통령의 연설이 중간쯤에 이르렀을 무렵 자리에서 일어나 독일제 모젤 권총을 꺼내들고 이 대통령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총성은 들리지 않았다. 재차 이 대통령의 등을 보며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탄은 발사되지 않았다.

류시태는 현장에서 체포됐고 다음날인 6월 26일 당시 이범석 내무장관은 류시태의 배후인물로 의열단 출신 국회의원 김시현을 체포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1952년 1월 절대다수의 반대로 부결되자 이승만은 백골단 등 폭력조직을 동원해 국회를 압박했다. 같은해 7월에는 국회의원을 연금시키고 테러를 벌이면서 이미 부결된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안'을 끝내 통과시켰다. 앞서 1948년 10월 결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도 이듬해 이 대통령에 의해 반민특위 특별경찰대가 강제 해산당하면서 사실상 기능을 상실한 뒤 해체된 바 있다. 1949년 6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암살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1952년 8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사건을 기획한 김시현이 '살해동기'를 묻는 재판장의 물음에 "이 대통령은 동란이 발발하자 승용차를 타고 도망가 버리고, 백성들보고는 안심하라고, 뱃속에도 없는 말을 하고, 한강철교까지 끊어 선량한 시민들로 하여금 남하조차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며 "그 후에는 국민방위군 사건이며 거창(민간인학살) 사건 등으로 민족 만대의 역적이 된 신성모를 죽이기는커녕 도리어 주일대사까지 시켰으니, 그런 대통령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일국의 원수로서 의당 할복자살을 해도 용납이 안 될 것임에도 한마디의 사과조차 없으니 그게 대통령이란 말인가"라고 밝혔다. 

그러나 1952년 8월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류시태는 법정에서 "처음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암살할 계획이었으나 나중에는 경고만 하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에 권총 탄환을 일부러 물수건에 적셔 두었다가 불발탄으로 만들었다"라고 진술해 이승만을 살해할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법원은 사건 발생 석달 뒤인 1952년 9월 류시태와 김시현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이후 류시태와 김시현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두 사람은 마산형무소와 전주형무소를 거쳐 8년 뒤인 1960년 4.19혁명이 발발한 뒤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출옥한다. 석방되어 나오는 길에 류시태는 "그때 내 권총이 발사되기만 했더라면 이번에 수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지 않았을 터인데, 한이라면 그것이 한이다"라고 출감 소감을 밝혔다. 

"후암은 류시태 선생 호... 선생 무덤 맞다"
 
 류시태 관련 조선일보 기사
류시태 관련 조선일보 기사김종훈
    
이후 류시태의 활동은 알려진 것이 없다. 서울 불광동에 자리잡은 김시현만 1964년 6월 동아일보 기사에 '가난에 허덕이는 독립투사'라는 제목으로 소개됐을 뿐이다. 기사는 당시 김시현에 대해 "팔순의 김시현옹이 전셋돈을 마련하지 못해 쫓겨나게 생겼다"며 "그는 무상배급 밀가루로 연명하고 있다. 불광동 산비탈 단칸방에 전세 들어 살고 있으나 이달 말 그 셋방마저 내놓게 되었다"라고 묘사했다.

그로부터 8개월 뒤인 1965년 2월 조선일보에는 '독립투사 류시태옹(獨立鬪士 柳時泰翁)'이라는 제목의 부고 기사가 하나 실린다. 기사에는 "일제 때 의열단 사건으로 7년 동안 복역했던 독립투사 류시태옹이 17일 상오 3시 경북 군위군 군위면 외양동 자택에서 향년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라고 적혔다.

바꿔 말하면 당시 언론 역시 류시태와 김시현 두 사람에 대해 모두 독립투사로 인정하고 명명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류시태는 김시현과 마찬가지로 2021년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독립운동을 한 공로는 부인할 수 없으나 이승만 대통령 저격 미수사건으로 인해 실형을 받은 것이 족쇄처럼 작용하고 있다. 상훈법 제8조에는 "사형, 무기 또는 1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의 형을 선고받고 그 형이 확정된 경우에는 서훈이 취소된다"라고 명시돼 있다. 

이에 대해 기자에게 류시태 묘를 찾을 수 있게 류성룡 조부의 묘를 안내한 군위군 관계자는 18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류시태의 묘를 발견했다'는 소식에 "너무나도 잘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떼가 서지 않을 정도로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라는 말에 "그저 죄송하다"며 "법이 개정되지 않는 이상 지자체가 나서서 관리할 순 없다. 하지만 지나는 길에 개인적으로라도 들러 풀이라도 뽑아드리겠다"라는 심경을 밝혔다.

경북독립운동기념관 관계자는 "내부 자료를 확인한 결과 류시태 선생의 호는 비석에 새겨진 '후암'이 맞다"며 "군위군 야산에 자리한 묘 역시 류시태 선생의 무덤이 맞을 것"이라고 밝혔다.

의열단원 류시태의 묘는 경북 군위군 군위읍 외량리 산10번지, 서애 류성룡의 조부 묘로 향하는 길목 안쪽 고추밭 너머에 자리해 있다.
#류시태 #김시현 #밀정 #류성룡 #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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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팀 취재기자. 오늘도 애국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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