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국 주조 화폐1894년 주조된 전환국 화폐. 이중 백동화가 주조 화폐의 대세를 이룸.
이영천(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
장정은 화폐 단위를 푼(分), 전(錢, 10푼), 냥(兩, 10전)으로 구분하고 1푼은 황동, 5푼은 적동, 2전 5푼은 백동, 1냥 및 5냥 은화 4종류로 규정했다. 5냥 은화가 본위화폐, 은화 1냥 이하는 보조화폐다. 신식화폐가 대량 주조될 때까지 임시로 외화 혼용을 허용하고, 외화는 조선 화폐와 동질·동량·동가로 취급했다.
장정은 일본 제도를 본떠 채택한 은본위제로, 특히 제7조 규정은 조선에서 일화(日貨)를 유통하려는 의도다. 이에 일화 1원·20전·10전·5전·2전·1전이 조선에 유입된다.
전환국은 은(銀) 부족으로 본위화폐를 주조하지 못하고, 주조비 대비 수익성이 가장 큰 백동화를 대량으로 주조하여 유통한다. 왕실과 정부재정을 확대하려는 의도다.
백동화는 전환국에서만 주조된 것이 아니다. 장정엔 불법 주조금지와 처벌 규정이 없었고, 정부는 특주(特鑄, 특정인에게 주조권을 인정)·묵주(默鑄, 뇌물 받은 당국자 묵인)·사주(私鑄, 전환국 판형을 훔쳐 주조)를 비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심지어 외국에서 사주한 백동화가 대량으로 밀반입되는 형편이다. 전환국은 왕실 재정확보를 위해 매년 백동화 발행량을 엄청나게 증가시킨다.
그럼에도 백동화는 경기도에서만 주로 유통되었고, 삼남과 북부지역에서는 인플레이션 없는 현물유통이 대세였다. 백동화는 그만큼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고, 1900년대 초엔 '백동화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져 화폐가치 하락은 물론 민생이 파탄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백동화를 전국적으로 유통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한다. 조세 금납을 통한 백동화 확산보급이다.
대한천일은행 설립
아관파천으로 조선에서 일본 영향력이 잠시 주춤한다. 1896년 들어 독립신문과 협회, 나아가 독립문 건립 모금운동이 이어진다. 와중이던 1896년 6월 독립협회 구성원 주축 전·현직 관료가 출자한 민영 '조선은행'이 설립되어, 이듬해 2월 국고출납업무 위주로 영업에 들어간다. 하지만 독립협회 영향력 안에 놓여있던 한계로 1901년 문을 닫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