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 항공사진 1950.09.19
"월미산에 공원을 만들겠대!" "뭔 소리여?" "서정화 후보가 월미산에 있는 군인들을 내보내고 그 자리에 공원을 만들겠대" "....."
19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민주자유당 서정화 국회의원 후보의 공약을 들은 월미도 원주민들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른바 '월미도 공원' 공약은 인천에서 뜨거운 감자였는데, 월미도 원주민들의 심경은 좀더 복잡했다. 월미도에 주둔하던 해군이 드디어 나가는 걸까? 그런데 그 자리에 공원이 만들어지면 우리 고향은 어떻게 되는 거지?
1950년 월미도 폭격 이후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9일 미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바로옆 월미도폭격을 감행한다.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월미도를 절멸키로 한 미군은 네이팜탄 95발을 퍼부었고, 월미도 원주민들은 죽거나 도망쳐야 했다. 그날로 월미도에서 쫓겨난 주민들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들이 살던 마을에는 해군 부대가 들어왔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겨?"라는 질문에 모두가 묵묵부답이었다. 월미도에 공원이 생기면 원주민들의 귀향이 물거품이 된다는 불안감이 커져갔다. 시간이 흘러 1994년 추석을 앞둔 9월 19일. 월미도 출신 동갑 모임이 열렸다. 차흥열, 김경운, 차석주, 유기송은 매년 추석과 설에 모임을 하며 타향살이 설움을 달랬다.
"지난번에 서정화 국회의원이 한 얘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글쎄. 그게 금방 되겠어?" "그래도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때 한 사람이 툭 내던진 말이 사람들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저 군부대가 나가면 공원이 된다는데, 우리가 고향을 찾아야 되는 거 아녜요!" 이 말의 주인공은 차흥열의 아내 한인덕이었다. 모두 고향을 되찾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감히 입밖에 내기를 주저했는데 한인덕이 그 말을 한 것이다. 타지 출신인 한인덕이 그런 말을 하자 참석자들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날 추석 모임에서 시작해 1998년 드디어 '월미도 귀환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회장은 김경운이 맡았고, 총무는 장석주가 맡았다. 20여 명의 회원들로부터 회비를 받아 대책위원회 활동을 시작했다. 1952년과 1963년에 이은 '제3기 귀향대책위원회'였다.
'월미도 며느리' 한인덕
대책위는 "인천시장 귀하"로 시작되는 진정서를 인천광역시에 보냈다. 한국전쟁 때 빼앗긴 삶터를 원상복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한참 후에 인천시로부터 답변이 왔다. 토지대장이 있냐고. 즉, 월미산 자락 땅이 원주민 사유지였음을 증명할 기록이 있냐는 말이었다. 원주민들이 토지대장은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이 왔다. 인천시 중구청, 국방부, 청와대도 마찬가지였다. 귀환대책위원회는 '김빠진 맥주격'이 되었다.
결국 그 일로 김경운 대책위원장이 사의를 표명했고 설상가상으로 2004년에 뽑힌 신임 위원장도 2005년에 사퇴했다. "대책위원회를 해체하든지, 계속하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내립시다." 대책위원회 긴급총회가 열린 2005년도 인천의 한 식당에서 나온 소리였다. 이 자리에서 한인덕은 열변을 토했다.
"노점상도 불법이지만, 생존권을 계속 요구하니 판매대를 인정받는 것 아녜요!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싸움을 왜 포기합니까. 계속 합시다!"
이 말에 참석자들은 눈시울을 흘렸다. 그렇게 해서 '월미도 며느리' 한인덕(1945년생)은 귀향대책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2005년 1월 18일의 일이었다. 한인덕은 지난 2년간 대책위원회 총무 일을 진정성있게 수행해 회원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다. 특히 2004년도에 제2함대 관재부에서 나온 한 통의 문서를 찾아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 문서는 다름 아니라 "미군이 1951년도 징발한 불명(不明)의 재산 14필지를 보존등기' 했으니 잘 관리하라"는 내용이었다. 국방부가 당시 월미도에 주둔하던 제2함대에 내린 지침이었다.
대책위는 이 문서가 미군과 국방부가 이미 월미도 14필지를 사유지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봤다. '불명의 땅'이라면 소유자를 확인해 땅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런데 국방부는 그 땅을 1975년 국방부 소유로 등기이전했고 2001년에는 인천광역시에 땅을 팔아버렸다. 이 과정이 한인덕의 주도로 명백히 밝혀졌다.
한인덕은 대책위원장이 된 후 1년 동안 자료수집에 심혈을 기울였다. 서울과 대전의 국가기록원과 국립도서관에서 월미도에 관련된 각종 자료들을 수집했다. 한인덕의 열정은 전문 역사학자들조차 놀라움을 표할 정도였다. 2006년부터 국민권익위원회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쥐가 풀방구리 드나들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