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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며느리' 한인덕의 끝나지 않은 싸움

1950년 월미도 폭격 이후 고향에서 쫓겨난 원주민들... "대토 마련해 정착케 해달라"

등록 2022.03.05 19:04수정 2022.03.0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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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미도 항공사진 1950.09.19
월미도 항공사진 1950.09.19
 
"월미산에 공원을 만들겠대!" "뭔 소리여?" "서정화 후보가 월미산에 있는 군인들을 내보내고 그 자리에 공원을 만들겠대" "....."

19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민주자유당 서정화 국회의원 후보의 공약을 들은 월미도 원주민들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른바 '월미도 공원' 공약은 인천에서 뜨거운 감자였는데, 월미도 원주민들의 심경은 좀더 복잡했다. 월미도에 주둔하던 해군이 드디어 나가는 걸까? 그런데 그 자리에 공원이 만들어지면 우리 고향은 어떻게 되는 거지?

1950년 월미도 폭격 이후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9일 미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바로옆 월미도폭격을 감행한다.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월미도를 절멸키로 한 미군은 네이팜탄 95발을 퍼부었고, 월미도 원주민들은 죽거나 도망쳐야 했다. 그날로 월미도에서 쫓겨난 주민들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들이 살던 마을에는 해군 부대가 들어왔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겨?"라는 질문에 모두가 묵묵부답이었다. 월미도에 공원이 생기면 원주민들의 귀향이 물거품이 된다는 불안감이 커져갔다. 시간이 흘러 1994년 추석을 앞둔 9월 19일. 월미도 출신 동갑 모임이 열렸다. 차흥열, 김경운, 차석주, 유기송은 매년 추석과 설에 모임을 하며 타향살이 설움을 달랬다.

"지난번에 서정화 국회의원이 한 얘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글쎄. 그게 금방 되겠어?" "그래도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때 한 사람이 툭 내던진 말이 사람들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저 군부대가 나가면 공원이 된다는데, 우리가 고향을 찾아야 되는 거 아녜요!" 이 말의 주인공은 차흥열의 아내 한인덕이었다. 모두 고향을 되찾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감히 입밖에 내기를 주저했는데 한인덕이 그 말을 한 것이다. 타지 출신인 한인덕이 그런 말을 하자 참석자들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날 추석 모임에서 시작해 1998년 드디어 '월미도 귀환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회장은 김경운이 맡았고, 총무는 장석주가 맡았다. 20여 명의 회원들로부터 회비를 받아 대책위원회 활동을 시작했다. 1952년과 1963년에 이은 '제3기 귀향대책위원회'였다.

'월미도 며느리' 한인덕 


대책위는 "인천시장 귀하"로 시작되는 진정서를 인천광역시에 보냈다. 한국전쟁 때 빼앗긴 삶터를 원상복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한참 후에 인천시로부터 답변이 왔다. 토지대장이 있냐고. 즉, 월미산 자락 땅이 원주민 사유지였음을 증명할 기록이 있냐는 말이었다. 원주민들이 토지대장은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이 왔다. 인천시 중구청, 국방부, 청와대도 마찬가지였다. 귀환대책위원회는 '김빠진 맥주격'이 되었다. 

결국 그 일로 김경운 대책위원장이 사의를 표명했고 설상가상으로 2004년에 뽑힌 신임 위원장도 2005년에 사퇴했다. "대책위원회를 해체하든지, 계속하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내립시다." 대책위원회 긴급총회가 열린 2005년도 인천의 한 식당에서 나온 소리였다. 이 자리에서 한인덕은 열변을 토했다. 

"노점상도 불법이지만, 생존권을 계속 요구하니 판매대를 인정받는 것 아녜요!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싸움을 왜 포기합니까. 계속 합시다!"

이 말에 참석자들은 눈시울을 흘렸다. 그렇게 해서 '월미도 며느리' 한인덕(1945년생)은 귀향대책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2005년 1월 18일의 일이었다. 한인덕은 지난 2년간 대책위원회 총무 일을 진정성있게 수행해 회원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다. 특히 2004년도에 제2함대 관재부에서 나온 한 통의 문서를 찾아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 문서는 다름 아니라 "미군이 1951년도 징발한 불명(不明)의 재산 14필지를 보존등기' 했으니 잘 관리하라"는 내용이었다. 국방부가 당시 월미도에 주둔하던 제2함대에 내린 지침이었다.

대책위는 이 문서가 미군과 국방부가 이미 월미도 14필지를 사유지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봤다. '불명의 땅'이라면 소유자를 확인해 땅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런데 국방부는 그 땅을 1975년 국방부 소유로 등기이전했고 2001년에는 인천광역시에 땅을 팔아버렸다. 이 과정이 한인덕의 주도로 명백히 밝혀졌다. 

한인덕은 대책위원장이 된 후 1년 동안 자료수집에 심혈을 기울였다. 서울과 대전의 국가기록원과 국립도서관에서 월미도에 관련된 각종 자료들을 수집했다. 한인덕의 열정은 전문 역사학자들조차 놀라움을 표할 정도였다. 2006년부터 국민권익위원회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쥐가 풀방구리 드나들 듯 했다.
 
 인천상륙작전 후 71년이 지난 2021년 11월 2일, 당시 희생된 월미도 원주민을 비롯한 민간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가 인천시 중구 월미공원 내 제물포광장에 건립돼 제막식을 가졌다.
인천상륙작전 후 71년이 지난 2021년 11월 2일, 당시 희생된 월미도 원주민을 비롯한 민간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가 인천시 중구 월미공원 내 제물포광장에 건립돼 제막식을 가졌다.최도범

"월미도에 대토를 마련... 원주민 정착해달라"

한인덕은 어떻게 해서 월미도와 인연을 맺게 됐을까?

1950년 여름 난리 때는 피난 짐도 싸지 못했던 이금례(한인덕의 어머니) 가족은 1.4 후퇴 소식에 피난 대열에 합류했다. 유엔군 폭격으로 그들이 살던 개풍군(당시 대한민국 영토)은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임진강 나루터는 피난민들로 인산인해였다. 이금례는 딸 한인덕 등과 함께 나루터 초막에 볏짚과 가마니를 깔고 하루밤 잠을 청했다. 다음날 임진강을 건넌 그들은 경기도 파주로 갔다.

파주군 금촌에 다다른 이금례 가족은 피난민 수용소를 거쳐 힘들게 살았다. 그들의 삶이 펴기 시작한 것은 이금례가 금촌의 양복점에 출근하면서부터였다. 개풍에 살 적에 이금례는 양복 기술자였다. 한때 개풍에서는 '군수보다 월급이 많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딸 한인덕 기억에 따르면, 개풍 시절 집에는 미싱이 있었고, 전쟁이 나기 전에는 유치원도 다녔다. 당시 개풍과 개성은 도로가 제대로 정비된 번화한 도시였다. 그런  곳에서 양복 기술로 확고한 경제적 기반이 있었던 이금례는 말 그대로 여장부였다.

이후 이금례가 경기도 문산에서 가게를 열었는데, 가게가 세들어있던 건물의 주인 아들인 차흥열이 트럭 운전 일로 그곳을 드나들다가 한인덕을 만나게 됐다. 그런데 차흥열은 월미도 원주민이었다. 1950년 미군의 월미도 폭격시 사망한 가족은 없지만, 집이 부서지고 월미도에서 쫓겨나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월미도 원주민 차흥열과 피난민 한인덕은 운명처럼 만났다.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위령비 앞에 선 한인덕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위령비 앞에 선 한인덕 박만순
 
1952년부터 시작된 월미도 귀환운동은 2022년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한인덕은 2005년부터 지금까지 만 17년째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동안 안 해본 것도 없고, 찾아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인천광역시를 포함한 지자체, 국방부, 청와대, 국회 등을 다녔다. 하지만 진전은 없었다. 그리고 원주민들의 삶터였던 월미산 자락은 인천시민들의 쉼터인 '월미공원'이 되었다.

다만 2008년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월미도 사건을 진실규명했고, 미군에 의한 주민들의 피해도 밝혀졌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정부는 미국정부와 적극 협상에 나서 한·미 간의 공동조사와 피해자에 대한 공동책임을 질 것"을 권고했다. 또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귀향을 원하는 월미도 주민들에게 지원을 하라"고 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하지만 권고조치는 이행되지 않았다. 기껏 해야 월미공원 내에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졌을 뿐이다.

월미도 원주민들은 한결같이 이야기한다. "보상이고 뭐고 다 필요 없소. 나 살던 곳으로 보내주시오." 그런데 원주민들의 삶터는 월미공원으로 바뀌어, 이를 원상복구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렇다면 월미도 귀환운동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한인덕 귀환대책위원장의 답은 "월미도에 대토(代土)를 마련해 원주민들을 정착시켜 달라"이다. 100여 년간 조상과 자신들이 살아온 집과 땅을 빼앗긴 주민들의 이런 요구가 과한 것인가?
#월미도 #월미공원 #인천광역시 #국방부 #귀환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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