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토로마을에 나붙 그림과 글귀우토로는 재일교포의 고향, 우토로는 반전의 기념비 (왼쪽 위 사진) 등등 우토로마을에 나붙은 그림과 글귀 (2010.8.11)
이윤옥
"저희들은 우토로를 지키기 위해서 귀중한 성금을 보내주신 15만 명이 넘는 수많은 국민 여러분들, 국회의원님들, 네티즌 여러분, 멀리 나라 밖에 계시면서도 우토로를 위해서 온갖 힘을 써주신 여러분들, 위기 때마다 헌신적으로 보도를 해주셨던 방송사, 신문사 등 매스컴 관계자 분들, 그리고 아름다운재단, 우토로국제대책회의, 지구촌동포연대(KIN)를 비롯한 수많은 시민활동가 여러분들, 이제까지 우토로에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기울여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조국' 대한민국이 있어 무서울 것이 없는 용기로 우토로마을의 재건을 위해 힘써왔다는 김교일 회장의 위 인사말을 들은 것은 국치 100년(2010.8.11.)을 맞아 필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다. 그로부터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토로마을에 조선인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940년 무렵으로 일제는 태평양전쟁 중 교토 군비행장 건설을 위해 조선인들을 강제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때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함바(노동자가 합숙하던 임시 건물)를 지어 살았다. 서너 평 남짓한 함바에서 대여섯 명씩 숙식을 했던 강제 노동자들의 증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참했다. 놀라운 것은 필자가 그곳을 찾은 12년 전에도 마을 형편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찌그러진 함석지붕과 하수도 시설(상수도는 1989년 공동용으로 설치)이 변변치 않은 좁은 골목길은 1960년대 한국의 달동네를 연상케 했다. "인간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이라는 주민들의 증언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후 단 한 번도 '우토로마을'이 뇌리 속에서 떠난 적이 없다. 그런 가운데 1일자 <교토신문>에서 '교토 우토로 지구, 공생의 장 대망의 평화기념관 개관' 소식을 접하고 무척 기뻤다.
조선인 강제노동자들의 사무친 한(恨)이 80년 만에 풀렸다는 소식을 듣고 있자니 과거 그곳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우토로마을 옆에는 작은 도랑이 있었는데 도랑 건너편은 번듯한 일본인 마을이었고 우토로마을은 철거를 앞둔 판자촌 모양의 형편없는 주거 공간이었다. 그나마도 우토로마을 주민을 괴롭힌 것은 "뜬금없이 나타난 토지 소유주의 이주 소송 사태"였다. 수십 년을 살아온 주민들을 아무런 대책없이 쫓아내려는 소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