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각역 인근에 세워진 전봉준 장군 동상.
김종훈
우리 세대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관의 변화를 체감하면서 살아왔다. 초·중·고에서는 '동학란'으로 서술된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했고, 그런 역사관의 틀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동학란'이란 용어는 왕을 정점으로 한 지배계급 중심의 사회에서 통용된 역사관의 표현이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고려 무신정권 때 일어난 '노비해방운동'은 '천민의 난'일 수밖에 없었고, 최충헌 때 노비 만적의 거사는 '만적의 난'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1940년대 전후한 시기에 조선학을 공부하던 이들 중에는 고려 시대의 민중운동을 적극 평가해 '노비해방운동'이니 '만적의 노비해방운동'으로 평가한 분들이 있었다.
1960년 '4.19혁명'은 역사학계의 이런 시각을 바꾸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배자 중심의 역사인식을 민중 중심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럴 때 당시 동학농민들이 주장한 '폐정개혁안'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백성을 짓눌러온 봉건적 억압과 폭정을 개혁하자는 내용으로 이런 주장과 행동이 왜 '반란'일 수 있는가 하는 자기반성이 주어졌다.
그 주장들은 당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것이며 백성들을 억압에서 해방하기 위한 슬로건이었음을 인식하게 됐다. '동학란'이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전쟁'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 잡아갔다.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혁운동의 큰 봉우리로서 3.1혁명,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및 촛불혁명을 견인해내는 동력의 원천으로 자리 잡게 됐다.
동학농민혁명의 두 가지 성격
동학농민혁명은 제1차 '반봉건'적 성격과 제2차 '반제·반외세'의 성격을 가졌다. 제1차 봉기(1894.3.)는 조선사회의 봉건체제를 개혁하려는 혁명운동이었고, 제2차 봉기(1894.9.)는 일본군의 침략에 저항하는 혁명전쟁적 성격을 가졌다. 혁명전쟁이란 혁명운동의 진행과정에서 이 혁명에 대항하는 외세의 개입이 있을 경우 혁명군이 그 외세와 투쟁하는 것을 말한다. 국내의 봉건세력이 청나라의 개입을 요청하자 이를 구실로 일본군이 침략하게 됐다. 한국의 왕실을 점령한 일제를 향해 동학농민혁명군은 반제·반외세의 투쟁에 나섰지만 산화하고 말았다.
제2차 봉기가 반제·반외세를 표방한 전쟁이라고 할 때 그것은 외세에 저항, 주권을 수호하려는 반침략·독립전쟁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제2차 동학농민혁명은 독립운동 독립전쟁을 수행한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따라서 외세와의 독립전쟁을 이끈 '제2차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이 나라의 독립을 수호하려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그들 중 이 독립전쟁을 이끈 지도자로서 우선 전봉준과 최시형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시형과 전봉준, 독립유공자 서훈 미뤄서는 안 된다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란'이라는 잘못된 인식에 가려 한국사에서 제 위치를 갖지 못했다. 4.19혁명 이후 역사인식의 변화에 따라 동학농민혁명은 제 위치를 찾게 됐다.
그러는 동안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조상들의 후예들은 숨어 살다시피했다. 동학농민혁명의 '반봉건' '반외세'적인 성격이 인정·확산됨에 따라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고, 총리실 산하의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 특수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도 최시형, 전봉준, 손화중 등에 대한 독립유공자로서의 서훈을 요청하게 됐다.
제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을 항일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는 요청은 각계에서 분출되고 있다. 더구나 정부에서는 시기적으로 제2차 항일 동학농민혁명보다 조금 앞서 일어난 '갑오의병'(1894.8.) 참여자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려고 하는 만큼 최시형, 전봉준을 포함한 제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을 미뤄서는 안 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