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청학련 사건 재판 광경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이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장면으로, 심판관(재판관)은 현역 장성이며, 당시 재판장은 이세호 육군대장(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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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는 중앙정보부와 검ㆍ경이 혈안이 되어 뒤쫓았으나 그동안 이골이 난 피신으로 3개월 동안 강원도 내설악을 거쳐 강릉의 지우에게 의탁했다. 그리고 암울한 심경으로 시 <1974년 1월>과 <바다에서>를 지었다. 피신자의 고통과 신혼의 아내를 그리는 <1974년 1월>이다.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
다시 쳐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 조각 속에서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
겁먹은 얼굴
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토록 어렵게
사랑을 시작했던 날
찬바람 속에 너의 손을 처음으로 잡았던 날
두려움을 넘어
너의 얼굴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바라보던 날 그날
그날 너와의 헤어짐을 죽음이라 부르자
바람 찬 저 거리에도
언젠가는 돌아올 봄날의 하늬 꽃샘을 뚫고
나올 꽃들의 잎새들의
언젠가는 터져나올 그 함성을
못 믿는 이 마음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니면 믿어 의심치 않기에
두려워하는 두려워하는
저 모든 눈빛들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아 1974년 1월의 죽음을 두고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온몸을 흔들어
온몸을 흔들어
거절하자
네 손과
내 손에 남은 마지막
따뜻한 땀방울의 기억이
식을 때까지 (주석 1)
그는 4월 23일 대학시절의 친구 하길종 감독의 권유로 영화 <청녀(靑女)>의 조감독으로 촬영팀이 묵고 있던 신안군 대흑산도 예리관광 여관에서 체포되어 중앙정보부 6국에서 고문과 신문을 받고 5월 27일 기소되었다. 함께 기소된 사람이 54명이었다. 신직수가 발표한 <중요 피고인별 범죄사실> 중 김지하 관련 부문이다.
김영일은 1973년 11월 초부터 조영래에게 용공불순 학생들을 포섭하여 전국적 규모의 강력한 학생조직을 형성하고 반정부적 언론인, 지식인, 종교인에게 인권운동을 가장하여 이에 동조하도록 하여 지원세력의 저변확대를 기하고 거사자금은 김영일이 조달하도록 모의하는 한편,
동년 12월부터 1974년 2월 간에 민청학련 지도위원인 이철, 나병식, 서중석, 황인성 등과 기독학생총연맹 간사인 안재웅에게 폭력혁명을 일으킬 수 있도록 전국적인 학생조직을 결성하되 이미 조직이 잘 되어있는 기독학생총연맹과 반정부지도자들을 모체로 하여 서울과 지방의 결속을 강화하고 그 조직을 1선과 2선으로 복선조직을 하도록 선동함으로써,
정부 전복의 중심체가 될 민청학련을 조직케 하고 등 단체의 조직과 그 거사를 위한 자금을 조달키 위하여 천주교 원주교구 주교 지학순과 모의한 후 그로부터 제공받은 금 108만원을 민청학련의 거사자금으로 제공하는 등 활동을 한 자임.
7월 21일 열린 비상군법회의 첫 공판에서 김지하는 이철ㆍ유인태ㆍ여정남ㆍ김병곤ㆍ나병식ㆍ이현배 등과 함께 사형, 유근일 등 7명에게 무기징역 등 가혹한 형벌을 선고하였다. 이에 앞서 7월 8일 열린 인혁당계에 대한 결심공판에서는 서도원ㆍ도예종ㆍ하재완ㆍ송상진ㆍ이수병ㆍ우홍선ㆍ김용원 등 7명에게 사형을, 김한덕 등 8명에게 무기징역, 나머지 6명에게 징역 20년이 각각 구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