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픽사베이
맞은편 테이블에 한 가족이 자리를 잡는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들과 딸 그리고 아빠, 엄마. 메뉴판에 각자 시선을 한참 고정시키더니 음식을 주문한다. 이어지는 침묵. 네 명의 가족은 주문이 끝나자 아이돌의 칼군무처럼 각자의 스마트폰으로 일제히 시선을 내리 꽂는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침묵. 가족들의 얼굴에 표정이 없다. 식당에서 이제는 이런 가족을 흔히 보게 된다.
외식은 즐거운 가족의 행사다. 아이들의 성화에 못이긴 척 아버지가 외식을 선언하면, 식사준비 등에서 해방된 엄마도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식당에 도착하면 맛있는 음식을 기다리며,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혼난 일, 친구때문에 속상했던 일. 함께 먹을 음식이 테이블 위에 놓이면 아이들은 하나라도 더 먹기위한 신경전을 벌였다.
엄마는 배가 부르시다며 자신의 접시에 놓인 음식을 아이들 앞으로 슬쩍 밀어 놓았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편안함 속에 배는 불러오고 감정의 포만감도 함께 느껴졌다. 가족의 외식은 그런 것이었다.
우리는 마음속에 쌓아둔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다. 학교에서 상장을 받은 날이나, 선생님께 혼난 날 하교 길을 거쳐 집 문을 세차게 열면서 "엄마"를 힘차게 불렀던 건 내 기쁨을, 내 억울함을 엄마에게 풀어 놓기 위해서 였다.
"참 잘 했구나.", "으이구 좀 잘하지그랬어." 엄마의 반응은 내 기대를 저버릴 때도 많았지만 그저 털어 놓는 과정이, 나의 답답함에 반응해 주는 엄마가 그냥 좋았다. 가족은 특별하다. 물리적, 육체적으로 그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니까. '언제든지, 부담없이' 이런 단어가 가장 잘 어울려야하는 나의 공동체이다.
예전에는 저녁이 되면 가족 식사를 마치고 TV앞에 모두 모여 앉아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맞장구를 치거나 등장인물을 비난하면서 감정을 공유했다. 지금은 같은 시간,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생각은 각자의 방향으로 달려간다. 스마트폰, 노트북과 같은 전자 기기는 가족의 개인화를 촉발했고, 점점 더 심화시키고 있다.
TV, 오디오, 비디오, 컴퓨터. 이런 제품들을 가전기기라고 불렀다. 가정용 전자제품이라는 뜻이다. 가정마다 한대의 TV, 한대의 오디오, 한대의 비디오가 있어서 가족은 그것들을 공유했다. 함께 TV를 봐야했고, 때로는 채널 선택권을 두고 다퉜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의 등장은 이런 가족의 풍경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사회의 개인화를 넘어 가정에서의 개인화가 일어났다.
가족의 공통 경험이 적어지면서 자연스레 집에서 대화가 사라져간다. 가족간의 대화 부족내지 단절은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대화가 사라진 가정은 더 이상 몸과 마음의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 여전히 단절되어 있는 외로운 장소가 되고 만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가 부정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사라지는 것이다. '가족'은 사회 생활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가족의 역할이 부실해지면 다른 모든 삶의 영역들이 따라서 약화된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위태로운 삶이 이어진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대화에서 시작된다. 그중에서도 가족간의 대화는 소금과 같다. 더 좋은 세상이란 결국 한 사람의 눈에 비친 세상이 더 좋아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은 바로 '나'이다. 나에게 더 좋은 세상의 시작은 따뜻하고 다정한 가족이 있는 세상에서 출발한다. 가족간의 사랑이 담긴 대화는 더 좋은 세상의 전제 조건이 된다. 이제 가족과 마주 앉은 시간에는 스마트폰을 내려놓자.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고 어색함을 날려버리자. 오랫동안 가족 사이에 있었던 벽을 부숴버리고 우리 삶의 제일 강력한 응원군을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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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분야에서 오랫 동안 일해오고 있습니다. 역사, 인문 등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요즘은 기술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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