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elements.envato
며칠 전부터 냉장고가 심상치 않았다.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한 거다. 처음엔 밤이 깊어지고 주변 소음이 잦아들면 그 소리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가 말겠거니 했는데 소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졌다. 공장기계 돌아가는 소리로 바뀌더니 나중엔 비행기 날아가는 굉음으로 바뀌었다. 물론 약간의 과장은 섞어 말하면 그렇다는 거다.
새로 산 지 4년쯤 된, 그 정도면 아직 신품이나 마찬가지여야 하는 제품이었다. 게다가 지난해 전 같은 증상으로 A/S를 받은 적이 있었다. 아, 역시 가전제품은 조금 비싸도 그 브랜드를 샀어야 해 하는 후회와 함께 살짝 짜증이 났다. 별 도리 없이 다시 A/S를 신청했다.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담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상냥했다.
그녀에게 전후사정을 말하자 잠시 후 A/S 담당직원과 연결해 줬다. 작년에 오셨던 그 분 같았다. 예의 그 친절한 목소리로 같은 고장이 났으니 얼마나 화가 나셨겠냐며, 자신이 대신 사과하겠다며, 그런데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으나 지금도 너무 많은 환자(가전제품)들이 대기 중이어서 부득이 닷새 후에나 방문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안내해 주었다.
이 더운 여름에 닷새는 너무 길었다. 하지만 여름 제철을 맞아 가전제품들이 열일하다 줄줄이 쓰러졌다는데, 하나같이 당신의 손길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데 왜 그리 늦냐며 항의하거나 더 빨리 와달라고 특별 대우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런다고 들어 줄리도 만무했다. 여기는 공정하고 투명한 21세기의 대한민국이니까.
냉장고의 대대적인 다이어트
그래도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소음은 더 기승을 부리고 있어 마음이 급해졌다. 때 마침 주말이었다. 냉장고를 청소부터 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문을 열자마자 대충 고장의 원인이 짐작 됐다. 용량에 비해 보관물이 너무 많았다, 특히 소음의 진원지로 추정되는 냉동실은 조명이 가릴 정도로 식품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일단 내용물을 다 꺼냈다. 생선과 고기는 물론 떡과 만두까지 얼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망라돼 있었다. 조금 수상해 보이는 것들은 미련 없이 버렸다. 아직 먹을만 한 것은 냉장실로 옮겼다. 이번 주중 조금씩 녹여서 바로 해먹을 요량이었다. 안을 깨끗이 닦고 다시 보관할 것들만 정리해 넣었다. 절반도 채 남지 않았다. 어둡고 음습했던 내부가 훤하게 밝아졌다.
냉장실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중 삼중으로 식품들이 가득차 있었다. 모두 꺼내 놓고 유통기한 지난 제품들은 모두 폐기 처분했다. 수납받침대를 깨끗이 닦아 다시 끼워 넣고 그 위에 남은 음식물들을 가지런히 놓았다. 음식물들은 맨 앞에 한 열만 남았다. 굳이 그 안까지 들여다보지 않아도 뭐가 있는지 한눈에 알 정도가 됐다.
냉장고의 대대적인 다이어트었다. 오래 됐거나 상한 음식물들은 지방이나 콜레스테롤 같은 존재였다. 불필요한 몸 안의 불순물들을 말끔히 제거한 셈이니 냉장고는 얼마나 시원할까, 보는 내 속도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띵똥띵똥 빨리 문 닫으라는 벨이 울릴 때까지 흐뭇하게 냉장고 안을 응시했다. 물론 그때까지도 굉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날 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냉장고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전에도 모터가 쉬는 시간이면 당연히 소리가 나지 않아 그래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모터가 돌아가고 있는데도 소리가 나지 않는 거였다. 혹시 냉장고가 완전히 사망한 건 아닌지 몇 번이고 문을 열어 봤지만 냉동실도 냉장실도 멀쩡하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도 냉장고는 별 소리 없이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A/S도 취소했다. 과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냉장고는 강도 높은 체중감량 덕에 치유된 듯했다. 자기 한계에 비해 너무 많은 일을 시키니 냉장고가 잠시 거부반응을 보인 것이었기에 그 안을 깨끗이 정화한 것만으로 냉장고는 정상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였다. 자연치유 요법은 냉장고에도 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