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책 표지
필요한책
- 1928년 그는 총독부로부터 경성중학교 교사직을 파면 당하고 그 당시 일본인으로서 극히 드물게 '조선 추방'을 선고 받는다. 왜 총독부는 그에게 이렇게 과격한 조치를 취한 것인지?
"<흙담에 그리다> 발금 및 압수, 시인의 항의방문과 삭제된 시집의 회수는 당시<경성일보>에도 상세히 기사화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거치고 그는 일본 여성 시인과 결혼해 경성중학교로 직장을 옮기고 시인으로서 그의 정체성은 더욱 강고해졌고, 당시 유명한 조선과 일본 시인들과도 공고한 관계를 갖게 된다. 그는 경성에서 문화교류의 폭을 넓혀 1926년에는 '조선예술잡지' <아침> 창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그해 10월 아내와 동생의 도움에 힘입어 시 전문잡지 <아시아시맥>도 창간했다.
그런데 이 잡지 또한 치안방해로 발매금지와 압수 처분을 받고, 그는 교사직 휴직을 강권 받고 잡지는 종간된다. 역시 수록된 시 내용이 문제였다. 1928년 아내와 공동 편집자로 다시 시 잡지 <징(鋲)>을 창간하지만, 결국 서른 살의 그는 이 시잡지 활동 때문에 교사직을 파면당하고, 일체의 환송회를 불허한 영구 조선추방을 선고받는다. <징>이라는 시잡지의 성격과 수록된 시가 직접적 이유가 되었다."
"1930년대 일본, 치안유지법 내세워 사상탄압 시작... 동생마저 검거돼"
- 1933년 <일본 프롤레타리아 시집> 건으로 그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두 달간 고문을 받는데 왜 일본정부는 같은 일본인을 그렇게 혹독하게 대했나?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1920년대에 큰 세력을 형성하고 영향력 있는 문학자들을 배출해 낸다. 그러나 1930년대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점차 사회변혁이나 계급혁명을 주장하는 이들을 탄압한다. 치안유지법을 내세워 혹독한 사상 탄압을 실시하게 되었다. <게 공선>으로 유명한 고바야시 다키지 같은 작가는 1933년 경찰서에서 옥사하고, '전향'에 응하지 않는 많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자들이 검거, 구류, 고문 등의 탄압을 받았다. 일본으로 귀국한 겐지는 프롤레타리아 작가동맹에 가입하고 다른 필명으로 활동하며 <프롤레타리아 시집>의 간행에도 관여했고 전향하지 않았으니 명백한 탄압 대상이었다."
- 1941년 고문 후유증과 생활고 등으로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그가 자택에서 요양중일 때, 그의 동생이 일본경찰에게 검거-재검거 등을 반복하게 되는 이유는?
"동생 소지는 그보다 9살 어렸는데, 한반도행과 일본 귀국을 함께 하면서 나이차 많은 형에게 무조건적인 신뢰와 경애를 품었다. 사실 조선 추방의 실마리가 된 <아시아시맥> 잡지에서도 젊은 혈기를 그대로 표출한 소지의 시 작품이 치안방해의 명목에 제대로 타겟이 되어 잡지 발매금지와 압수로 이어졌다. 1938년 결핵을 진단받았음에도 생계 때문에 휴양하지 못했던 겐지는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1941년 급기야 쓰러지게 되고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된다. 설상가상 같은 시기에 34살이 된 소지는 검거되었다가 '조발성 치매증'을 진단받고 병원에 입원, 퇴원하자마자 재검거 되었다. 아마 검거와 고문 과정에서 정신적 타격을 크게 입은 것이라 추측되는데, 겐지가 살아서 발표한 마지막 시 「미친 자와 미치지 않은 자」가 이 무렵의 작품이라 당시의 참담한 심경을 엿볼 수 있다."
- 오늘날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일이 왜 한국인들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약 백 년 전 한반도의 산천과 초목, 항상 백의를 입고 온돌방이 있는 버섯 같은 초가집에 사는 식민지 조선인의 의식주 풍속, 겨울 준비로 산더미 같은 김장을 해내는 모습에 조선 아이들의 천진함까지 겐지의 시에 담겨 있다. 그는 '조선색'으로 강조되던 한반도의 자연과 생활습속의 특성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하고 근대시로 탄생시켰다. 글로컬리즘이 강조되는 오늘날 한류의 역량이 한국적인 것을 담아낸 세계화와 직결되고 있는데, 그 한국적인 것의 원형과 전통이 백 년 전 겐지가 시 창작으로 영위한 측면과 연결된 맥락임을 느낀다.
겐지는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의 특색을 노래하며 제국의 압박과 저주를 표현하다 조선에서 추방당한 일본인이며, <흙담에 그리다>와 <까치>에는 조선에 대한 유대감과 동아시아로 확장된 연대 의식, 가난한 사람에 대한 공감과 의식의 성숙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일본 문단은 잊어도 우리는 잊으면 안 되는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 한일관계는 요즘 특별히 좋지 않은 것 같다. 일본문학 전공자로서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위해 두 나라와 국민들의 어떤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보는지?
"갈등과 혐오를 부추기고 드러내는 일은 이해와 우호의 시선을 표현하는 것보다 손쉽고 자극적이며 즉각적이다. 그리고 최근 3년 가까이 정치적 이유와 팬데믹 때문에 왕래가 단절되어 온라인과 매체를 통한 간접 경험만이 확산되면서 악순환을 유도한 면도 존재한다. 하지만 한일 간의 정책이나 원칙, 논리와 같은 말들을 내려놓고 막상 서로의 의식주생활을 체험하고, 문화예술에 대한 취향을 접하며, 추구하는 가치관을 듣다 보면 호감도가 올라가고 공감대 또한 금방 형성된다. 대학에 있는 입장이다 보니 한일대학생들이 서로 만나게 되면 첫 대면에서도 한두 시간의 대화만으로도 친구가 되고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사이가 되는 장면을 목격하며 놀라고 감동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중장년층으로 가면 한일 간의 관광객 교류에서도 비슷한 구도가 형성된다.
우치노 겐지가 조선 사람들을 보고 그 문화적 특성을 시로 쓴 것처럼.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서 친구가 되려는 선의로 대화를 시작하고, 상대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묻고 알려주고 맞장구를 쳐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관계의 시작은 가능하다. 좋은 관계 맺기 이전에 도합 2억에 가까운 일본인, 한국인을 균일한 집단으로 상상해 일본인은 이래서 어떻다, 한국인은 저래서 저렇다는 식으로 일괄해 획일적으로 평가, 판단하며 규정짓는 습관을 떨쳐내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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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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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 사랑하다 추방당한 일본인, 한국은 기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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