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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로 푹 잠긴 동짓날의 군산

엄마가 쑤어준 붉은 팥죽과 함께 바라본 흰 세상

등록 2022.12.23 09:15수정 2022.12.2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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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팥 드릴께요. 팥죽 쑤실거죠?"
"군산시 살림은 다 하는 것 같은 네가 때가 되었다고 팥죽은 생각나더냐? 가져와봐라."
"엄마, 다 때를 잘 지켜야 사는게 재밌죠. 동짓날 엄마 팥죽이 없으면 맛없는 날이지요."



며칠 전 거리에서 할머니가 파는 팥 한 되를 샀다. 당신이 직접 농사를 지은 거라고 동지 때 죽도 쑤어먹고 요즘 같이 쌀쌀할 때 찹쌀 한 주먹과 팥을 넣어 밥을 하면 윤기있고 영양분 있는 밥을 먹는 거라고 덧붙였다. 붉고 작은 팥알의 생김에 끌려, 또 친정엄마에게 이쁨 좀 받을 요령으로 팥 한 되만 달라 했다. 할머니는 내가 몰래 쥐어든 팥 한주먹에도 웃으시며 '색시가 욕심 있고만?'이라며 눈감아주셨다.

동지의 의미
 
 동짓날 팥죽
동짓날 팥죽박향숙

동지 전날은 소지(小至)라 하여 책방 아침편지에도 동지 관련시로 두보(당나라 시인)의 시를 보냈다. 冬至陽生春又來(동지양생춘우래) -동지에 양이 생겨 다시 봄이 도래한다-는 시어만 들어도 동지를 기점으로 태양기운이 밝아지고 밤보다는 낮이 길어지겠구나 싶었다. 태양의 순환으로 절기를 삼고 더불어 삶의 이치를 적용하여 살아온 조상의 지혜는 새롭기만 하다.

동짓날 아침 군산의 대설주의보로 동지날 팥죽 한 그릇 먹고 가라는 엄마의 말씀에도 친정 나들이는 동여매었다. 대신에 집 앞 월명산 호수로 갔다. 각시랑 사진을 남기고 싶다는 남편을 설국열차 타는 기분으로 뒤따랐다. 가는 길에 시 공무원들이 공원 입구에 쌓인 눈을 치우고 길을 내느라 수고하시는 모습에 인사를 건네며 호수쪽으로 걸었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내 맘속 깊은 곳에 감정항아리 하나가 있었음을 알았다는 사실이다. 무엇이든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눈여겨보고 말을 걸어본다. 무생물인 의자 하나, 돌멩이 하나도 한결같이 말을 걸어온다. 대꾸를 해주어야 그들이 서운하지 않을 것 같아 사진도 여러 각도로 찍어서 지인들과 공유한다. 그러면 그들은 정말 살아나는 것 같다.

며칠 전 눈 속에 덮인 군산시 말랭이 마을을 사진에 담으면서 어깨동무하고 있는 항아리들, 제 속을 하늘 높이 던지며 다 보여주는 감나무, 슬슬 퇴색하며 자취를 감추려는 담쟁이 넝쿨들하고도 한동안 얘기를 나눴다. 오늘도 월명의 산책길은 눈발을 헤치고 오는 사람들을 열렬히 환영하는 양 눈발의 기세가 대단했다.


단 5분도 안되어 온 몸에 쌓인 눈으로 살아 움직이는 눈사람이 되었다. 설경 속에 서 있는 내 모습에 내가 취해서 춥기는커녕 오히려 가슴속에 모닥불 하나가 지펴졌다. 동지는 우주의 음의 기운이 그 정점을 찍고 양기 한 줄을 긋는 날이라더니, 내 맘에도 따뜻한 기운 하나가 금을 그려주었다. 그 순간 정말 따뜻한 시 한 줄이 생각났다. 박노해 시인의 <그 겨울의 시>다.

그 겨울의 시 - 박노해​


​문풍지 우는 겨울 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 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 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죽지 않을랑가
뒷산의 노루 토끼들은 굶어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하략)


할머니의 시 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었던 시인의 꿈속은 분명 동지 팥죽보다 더 따뜻하고 달콤한 온기로 가득했을거다.

"올해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 
 
월명호수 산책길의 설경 고요히 때론 세차게 내리는 동짓날 무언의 눈세상을 바라보며.
월명호수 산책길의 설경고요히 때론 세차게 내리는 동짓날 무언의 눈세상을 바라보며.박향숙

사시사철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군산의 월명호수 설경을 안고 내려와 지인들에게 사진으로 동짓날 아침의 행보를 전했더니, '이런 날씨에 대단하이. 저런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지'라는 답장이 있었다. 어린애처럼 놀고 있는데 엄마의 전화가 왔다.

"네가 준 팥죽으로 쑨 것이니 새알 하나도 버리지 말고 먹어라. 학원선생님들도 한 숟가락이라도 드시고 올해 안 좋은 일이 있었으면 팥죽새알심 하나로 액땜 다 벗어버리라고 전하고."

어부마님 울엄마의 속은 하늘에서 내리는 흰 눈보다 희고도 고우리라. 붉은 팥죽보다 더 열정의 붉은 마음이리라. 생각하며 '엄마 탱큐예요'라고 전했다.

오늘 아침 책방에서 보내는 편지에 한용운 님의 '冬至(동지)'라는 한시를 보냈다. 책방에 온 손님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울엄마에게는 한번도 보내드리지 않은 것 같아서 목소리로 들려드렸다. '그건 또 뭔 말이다냐'라고 하시면서도 '옛부터 동지는 큰 명절이었고 진짜 새해 첫날이었다'라고 답하셨다. 울엄마의 말씀은 정말 보물보다 더 귀한 글 금고이다.

冬至(동지) - 韓龍雲(한용운)

昨夜雷聲至(작야뇌성지) 지난 밤 우레 소리 귓전에 이르러
今朝意有餘(금조의유여) 오늘 아침 의미에 남음이 있도다!
窮山歲去後(궁산세거후) 깊은 산속에도 한 해가 가고 나면
古國春生草(고국춘초생) 옛 나라의 봄이나 풀은 돋아나리라
開戶迎新福(개호영신복) 문을 열고서 새로운 복을 맞이하고
向人送舊書(향인송구서) 사람에게 권하며 옛 책을 보내리라
群機皆鼓動(군기개고동) 뭇 중생 모두 다 심장에 고동치니
靜觀愛吾廬(정관애오려) 아끼는 내 오두막을 고요히 보련다
#동지날 #군산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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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희망은 어디에서 올까요. 무지개 너머에서 올까요. 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임을 알아요. 그것도 바로 내 안에. 내 몸과 오감이 부딪히는 곳곳에 있어요. 비록 여리더라도 한줄기 햇빛이 있는 곳. 작지만 정의의 씨앗이 움트기 하는 곳. 언제라도 부당함을 소리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일상이 주는 행복과 희망 얘기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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