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 팥죽
박향숙
동지 전날은 소지(小至)라 하여 책방 아침편지에도 동지 관련시로 두보(당나라 시인)의 시를 보냈다. 冬至陽生春又來(동지양생춘우래) -동지에 양이 생겨 다시 봄이 도래한다-는 시어만 들어도 동지를 기점으로 태양기운이 밝아지고 밤보다는 낮이 길어지겠구나 싶었다. 태양의 순환으로 절기를 삼고 더불어 삶의 이치를 적용하여 살아온 조상의 지혜는 새롭기만 하다.
동짓날 아침 군산의 대설주의보로 동지날 팥죽 한 그릇 먹고 가라는 엄마의 말씀에도 친정 나들이는 동여매었다. 대신에 집 앞 월명산 호수로 갔다. 각시랑 사진을 남기고 싶다는 남편을 설국열차 타는 기분으로 뒤따랐다. 가는 길에 시 공무원들이 공원 입구에 쌓인 눈을 치우고 길을 내느라 수고하시는 모습에 인사를 건네며 호수쪽으로 걸었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내 맘속 깊은 곳에 감정항아리 하나가 있었음을 알았다는 사실이다. 무엇이든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눈여겨보고 말을 걸어본다. 무생물인 의자 하나, 돌멩이 하나도 한결같이 말을 걸어온다. 대꾸를 해주어야 그들이 서운하지 않을 것 같아 사진도 여러 각도로 찍어서 지인들과 공유한다. 그러면 그들은 정말 살아나는 것 같다.
며칠 전 눈 속에 덮인 군산시 말랭이 마을을 사진에 담으면서 어깨동무하고 있는 항아리들, 제 속을 하늘 높이 던지며 다 보여주는 감나무, 슬슬 퇴색하며 자취를 감추려는 담쟁이 넝쿨들하고도 한동안 얘기를 나눴다. 오늘도 월명의 산책길은 눈발을 헤치고 오는 사람들을 열렬히 환영하는 양 눈발의 기세가 대단했다.
단 5분도 안되어 온 몸에 쌓인 눈으로 살아 움직이는 눈사람이 되었다. 설경 속에 서 있는 내 모습에 내가 취해서 춥기는커녕 오히려 가슴속에 모닥불 하나가 지펴졌다. 동지는 우주의 음의 기운이 그 정점을 찍고 양기 한 줄을 긋는 날이라더니, 내 맘에도 따뜻한 기운 하나가 금을 그려주었다. 그 순간 정말 따뜻한 시 한 줄이 생각났다. 박노해 시인의 <그 겨울의 시>다.
그 겨울의 시 - 박노해
문풍지 우는 겨울 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 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 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죽지 않을랑가
뒷산의 노루 토끼들은 굶어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하략)
할머니의 시 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었던 시인의 꿈속은 분명 동지 팥죽보다 더 따뜻하고 달콤한 온기로 가득했을거다.
"올해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