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아이의 마음이 꺾이는 순간

연말 서점에서 북적이던 문제집 코너를 보고... 책 읽는 대한민국을 희망합니다

등록 2023.01.02 08:57수정 2023.01.02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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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31일, 기한이 정해져 있는 쿠폰을 사용하러 집에서 조금 멀리에 있는 지역의 나름 대형 서점에 갔습니다. 주말 오후라 그런지 꽤 넓은 매장에는 사람이 가득했습니다.


'새해 목표에 독서를 넣은 사람들이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책을 사러 왔나보네.'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도 있고, 특히 청소년들이 많아서 우리나라의 앞날이 밝다 생각하며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오~ 책 읽는 대한민국!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보니 사람들이 특히 많이 모인 곳은 바로 문제집 코너였습니다. 신학기를 대비해 문제집을 고르느라 엄청 진지한 분위기였지요. 2명의 직원이 과목별로 각종 문제집의 위치며 난이도, 특징들을 설명하느라 바빴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리키는 책들은 학생과 부모님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바이블, 기적, 역전, 왕도' 등 거창한 제목을 하고 화려한 표지를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선택의 고민이 끝난 사람들은 저마다 예닐곱 권의 문제집을 품에 안고는 곧바로 계산대로 향했고 십 만원이 넘는 금액을 계산하고 총총 사라졌습니다.

방학 동안 시간을 잘 활용해 열심히 공부하겠다며 문제집을 구입하는 분들을 탓 하는 게 아닙니다. 주요 과목 공부 물론 중요하지요. 하지만 주말 오후 서점 나들이에서 시간에 쫓기듯 문제집만 사고 서둘러 가는 모습이 조금 안타까웠어요. 마음의 여유나 주말의 느긋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서요. 


에세이 코너의 제목이라도 훑어보고 시 코너에서 마음에 드는 시집을 한 번 들춰보면서 공부할 때 힘들면 읽어보라 권했다면 어땠을까요? 만 원 안팎의 마음의 양식을 하나 끼워 넣는다고 살림에 큰 영향이 있지 않을 텐데요. 자투리 시간에 소설책 읽는다고 공부에 큰 방해가 되진 않을 텐데 말이죠. 이런 저런 생각에 마음이 복잡하던 찰나, 옆에 있던 아이와 엄마의 대화가 귀에 들려왔습니다.

"엄마, 나 이 책 사면 안돼요?"
"○○야, 이제 곧 학교 들어가니까 공부해야 해. 다른 친구들은 다 이런 문제집 푼대. 학교 가서 다른 애들보다 못하면 좋겠어?"



아이의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꺾이는 순간을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책 읽기 대신 공부를 해야 하고, 다른 아이들과 비교가 시작되는 곳이 학교라는 엄마에게 아이는 더 이상 자기 주장을 펼치지 않았습니다. 엄마의 논리가 잘못됐다고 지적해주고 싶었지만 처음 본 남의 아이 교육에 이러쿵저러쿵 할 수는 없었지요.

또 '나는 어땠었나?' 되짚어보니 완벽히 떳떳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림책보다는 글밥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권유하고, 독후감을 억지로 쓰게 한 적도 많았지요. 참 부끄러운 엄마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은 나의 아이들은 독후감을 완강히 거부했고 어떨 때는 만화책에, 또 소설책에 흠뻑 빠졌습니다.

본인 의사를 분명히 말한 과거의 아이들에게 고맙고,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한 과거의 나에게도 감사할 일입니다. 시키지 않아도 책 읽고 소감을 말하고 학교 독후록에 빽빽이 감상을 써 내고, 삶이 답답할 때 책을 찾는 청소년으로 자라주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조금 더 치열하게 책을 읽었으면 하는 욕심이 생기지만 절대, 절대 내색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압니다.

제가 잠깐 본 모습으로 그 아이들과 부모들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집을 한아름 사 간 그 아이들이 주요 과목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틈틈이 읽고 싶은 책도 찾아서 읽고 있을 거라고 기대해 봅니다.

문제집에 밀려 사고 싶은 책을 포기한 아이가 언젠가 자기 주장을 할 날이 올 거라 믿어 봅니다. 많은 부모들이 학교 공부보다 마음공부가 중요하다고 말할 때가 오기를 바랍니다. 
#책읽는대한민국 #마음의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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