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3.1 발포사건 설명문을 읽고 있는 어린이
임병도
제주에서 4.3 사건이 발생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3.1 발포사건을 알아야 한다. 1947년 3월 1일 제주 11개 지역에서는 3.1절 기념대회가 열렸다. 당시 제주 인구의 17%가 넘는 5만여 명의 도민들이 참석할 정도로 열기는 뜨거웠다.
항일 투사와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이 된 3.1절 기념대회는 씨름대회 같은 각종 부대 행사가 열리는 등 축제와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열린 기념대회는 피로 얼룩졌다.
가두시위 도중 관덕정 인근에서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여 다쳤다. 기마경찰은 아이를 구호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도민들이 항의하자 경찰은 총을 쐈고 민간인 6명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숨진 이 중에는 젖먹이 아이를 가슴에 안은 젊은 엄마도 있었다.
도민들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조경옥 경무부장은 좌익에 선동된 군중이 집단으로 폭행에 가담해 불가피하게 발포를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견디다 못한 제주도민들은 3.10 총파업에 들어갔다.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학교, 은행, 회사, 기관은 물론이고 현직 경찰까지도 동참했다. 3월 13일까지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가 참여하는 사상 유례없는 총파업이었다.
도민들은 '고문 폐지', ' 발포 책임자 처벌', '경찰 수뇌부 사퇴', ' 희생자 유가족과 부상자에 대한 보상' 등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미 군정과 경찰은 시위 주도자를 검거한다며 2500여 명이 넘는 도민들을 체포했다.
미 군정과 경찰은 남로당이 북조선과 연계했다며 제주를 빨갱이 섬으로 낙인찍었다. 특히 파업에 동참했던 경찰들을 대거 파면하고 서북청년단을 불러들여 도민을 억압했다.
제주도민을 향한 무자비한 탄압과 검거는 제주 4.3 사건을 불러일으켰다. 공식 희생자 1만4532명, 비공식 2만5000명에서 3만여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태영호의 색깔론은 제주 도민을 두 번 죽이는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