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도서관1936년 여름 필자의 부친 김의한이 장시성 우낭현의 쑨원기념 중산도서관 관장으로 일할 때 도서관 앞에서 찍은 사진. 앞줄 왼쪽 넷째가 모친 정정화, 다음이 부친 김의한이다. 부친 앞의 소년이 김자동이다.
김자동
우리도 다른 임정 가족들과 함께 자싱에서 살았다. 1934년 봄 아버지가 취직을 하면서 장시성 평청현으로 옮길 때까지 2년여를 자싱에서 살았다. 그때 내 나이 여섯 살이었는데 그때부터 대략 옛일이 기억난다. 아직도 기억이 또렷한 것은 항저우에 놀러갔던 일이다. 항저우는 원래 눈이 별로 안오는 지역인데 그해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렸다. 그래서 집집마다 아이들이 나와 동네 어귀에서 눈사람을 만들며 놀았다. 어렴풋하게나마 항저우 서호(西湖)에서 뱃놀이를 한 기억도 있다. (주석 1)
우리 민족은 고래로 교육열이 강하다. 나라 잃고 해외에 떠돌면서도 자식 교육만은 놓치려 하지 않는다. 임시정부 가족들도 다르지 않았다. 국권회복의 일념 때문에 더욱 강했을 것이다.
내가 처음 들어간 학교는 장시성 평청현에 있는 소학교였다. 1935년 봄, 일곱 살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앉아서 임정의 돈을 축내는 게 싫다며 잠시 중국 지방정부의 공무원 일을 하셨다. 그때 학교 선생님들이 나를 많이 귀여워했다. 여자 선생님 한 분은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후동이(어릴 적 내 이름)는 가감법도 할 줄 알고 한자도 많이 아니 1학년에 다닐 필요가 없겠다"고 하고는 2학년으로 월반을 시켜주었다. 거기서 일 년 가까이 다니다가 우닝현으로 이사했다. (주석 2)
중국에서 태어난 김자동은 우리말 보다 중국어를 더 많이 듣고 자랐다. 집에서는 부모와 우리말을 하지만 밖에서는 온통 중국말이었다. 아버지가 신장성 제1전원공서에 취직하여 우닝으로 옮기면서 가족도 함께 갔다. 그리고 난징으로 다시 이사하였다.
난징에서 백범의 차남 김신 형과 한 집에 살았는데 형은 중학교 들어갈 나이(1922년생) 임에도 소학교 5학년으로 들어갔다. 우리로서는 억울한 일이었으나 다른 방도가 없었다. 당시 우리 둘은 중국 성씨로 변성명을 했다. 김신 형은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關雲長)의 성을 따서 꾸안신(關信), 나는 진(陳)을 성으로 해서 천런밍(陳仁明)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런데 우리 둘이 형, 동생 하니 아이들이 "성이 다른데 무슨 형제냐"며 놀려댔다. 할 수 없이 나는 친형이 아니고 사촌형, 외종형 등 생각나는 대로 들먹이다가 결국 그냥 친척이라고 둘러댔다. (주석 3)
김자동은 자질이 우수한 편이었다. 성격도 원만해선 중국 어린이들과도 잘 어울렸다.
생각해보니 소학교는 모두 다섯 군데를 다닌 것 같다. 장시성의 두 곳(평청·우닝), 난징과 퍼산, 치장 등이다. 퍼산에서 5학년 1학기를 다니다가 치장에서 5학년 2학기로 들어갔다. 류저우에서는 불과 4개월여밖에 머물지 않은 탓에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학교를 자주 옮기면서 중간에 공백이 생기니 아무래도 성적이 우수할 리가 없었다. 난징에서 푸대접을 받은 것은 지방간 학력 차도 있지만 이런 이유도 있다고 본다.
퍼산에 살 때 퍼산에서 제일 좋은 소학교에 보결시험을 봐서 합격한 적이 있다. 그때 아버지가 "합격을 하면 홍콩 구경시켜주겠다"고 약속하셔서 추석 휴가 때 홍콩에 가기로 돼 있었다. 퍼산과 홍콩은 가까웠다. 그런데 얼마 뒤 일본군이 광동까지 공격해오는 바람에 홍콩행은 좌절되었다. 그 소학교는 겨우 열흘 정도밖에 다니지 못했다. (주석 4)
주석
1> 김자동,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 51~52쪽,(이후 <회고록> 표기)
2> 앞의 책, 52쪽.
3> 앞과 같음.
4> 앞의 책, 5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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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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