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수 회장이 광주민중항쟁 당시에 10대 청소년들이 벌였던 활동을 설명하는 장면이다.
장태욱
5·18 광주민중항쟁에 참여했던 소년병이 43년이 지나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무장항쟁이 정당했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나눠준 총을 들고 싸우다가 친구가 죽은 것에 대해서는 평생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6월 민주항쟁 36주년 기념식 및 특별 초청강연회가 지난 10일 오후 5시 서귀포시 축협 흑한우명품관 회의실에서 열렸다. 서귀포 6월 민주항쟁 기념사업회(회장 이영일)가 최치수 '5·18민중항쟁 고등학생 동지회장'을 강사로 초빙해 마련한 자리다.
최치수 회장은 5·18 항쟁 당시에 고등학생 학생투쟁위원장을 맡았고 5월 27일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무너질 때까지 시민군의 일원으로 저항했다. 당시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지난해에는 편집위원장을 맡아 <5월, 새벽을 지킨 소년들>(백산서당) 출간하는 일을 주도했다.
최치수 회장은 당시에 "어린 학생들이 민주항쟁에 참여했는데, 초등학생 12명 가운데 2명이 죽었고, 중학생 37명 가운데 6명이 죽었으며, 고등학생이 243명 가운데 12명이 죽었다"라며 "그 어린 학생을 빼고 광주민중항쟁을 얘기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최치수 회장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고등학교 3학년 신분으로 5월 20일부터 시위대에 합류했다. 트럭 짐칸에 타서 광주시 외곽에 사는 시민을 시내 중심부로 실어 나르는 일을 도왔다.
21일 오전에 10만 명이 있는 시민이 금남로 일대에 모였고, 공수부대는 이날 오후 시위대를 향해 집단 발포했다. 총에 맞아 죽는 시민이 속출했는데, 학생들은 시신을 관에 넣고 태극기로 감쌌고, 가족이 시신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이날 발포를 계기로 시민은 인근 무기고를 털어 자체 무장을 시작했다. 시민군은 22일부터 총을 회수해서 계엄군에게 반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온건파와 끝까지 계엄군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강경파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다. 논쟁은 25일 새벽에 계속 싸우자는 의견으로 기울었고, 계속 싸우기 싫은 사람은 전남도청을 나갔다. 100여 명 시민은 도청 지하 무기고에서 총을 받았고, 고등학생도 총을 쏘는 방법을 익혔다.
최치수 회장은 "난 당시도 현재도 우리가 무장해서 싸우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계엄군에 투항했다면 민주주의 심장으로서 광주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시에 민주시민투쟁위원회 대변인을 맡았던 윤상원이 여학생과 고등학생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는데도 학생 다수는 현장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