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입양, 결연, 후원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자녀를 둔 송진안씨 부부.
송진안시 제공
지난 2일 부천 카페에서 만나 인터뷰한 송진안(64, 교사)씨 부부는 낳은 아들이 둘, 입양한 아들 하나에 수양아들까지 아들만 넷을 둔 '아들 부자'다.
큰 아들(36, 기혼)과 둘째 아들(32, 미혼)이 고등학교 중학교를 다닐 때 당시 다섯 살이었던 셋째 아들(23)을 입양했는데 이유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었다.
"연예인들이 부모가 없어 시설 대기 중인 어린아이를 돌봐주는 코너가 있었어요. 그걸 열 번을 넘게 보다가 저 아이가 결국은 시설로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도 많이 들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에 위탁을 해볼까 하다가 입양까지 생각하게 됐죠."
입양을 선택한 이유가 이른바 사회적 동기다. 남편은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입양을 반대하는 건 아니었다. 고등학생 중학생인 아들 둘의 교육비도 빠듯한 집안 경제 사정 때문이었다.
완고한 집안 어른들의 반대는 물어보나마나였지만 '어느 핏줄인지도 모르는데'라는 지인들의 부정적 반응은 우리 사회 혈연주의의 심각성을 일깨웠다. 이런 부정적 환경이 입양 결심을 오히려 부추겼다. 단지 시간의 문제였다.
또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있긴 했다. 위로 형들만 다섯이었던 남편의 로망은 딸이었지만 결혼 전부터 아들 셋이 로망이었던 아내의 선택은 하나 더 채워야 할 아들이었다. 그런데 성별의 문제는 사실 입양 결심과는 상관 없었다. 성별은 선택의 다툼이었다. 양육을 책임질 아내의 승리였다.
시간이 흘렀고 시댁의 가장 큰 어른 둘이 돌아가시면서 입양 환경이 무르익었다. 입양에 불이 붙은 건 당시 대안학교를 다니던 큰 아들이 기숙사로 떠나기 전 주말 마지막 저녁 식탁에서 한 말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입양 입양 얘기만 할 거예요?"
아들이 떠나기 무섭게 전화기를 들어 입양기관을 수소문했다. 입양을 하겠다는 결심만 했지 입양에 대한 공부는 전혀 없었다. 맞벌이를 계속 할 수 있게 젖먹이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만 있었다.
다섯 살 혹은 여섯 살 되는 아이를 입양하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다 될 줄 알았다. 그러니까 아이는 말귀를 알아먹을 것이고, 집안 환경은 흔들림 없을 것이란 단순한 생각이었다. 죽을만큼 힘들다는 큰아이 입양의 어려움은 꿈에도 몰랐다.
엄마아빠를 받아들인 그 순간
수소문 끝에 집에서 가까운 시설과 연락이 닿았다. 당시에는 가능했던 입양 방식이었다. 약속한 날 시설에 가서 선보기를 했다. 다섯 살 근이와 일곱 살 석이를 차례대로 만났다. 근이는 자다 깨서 억지로 끌려온 탓에 화가 나서 왔다가 바로 가버렸다. 고분고분했던 석이는 한 번 파양경험이 있는 아이였다.
가르쳐서 학교에 보낼 수 있는 다섯 살 근이를 입양하자는 둘째 아들의 의견이 그럴싸 했다. 몇 달을 시설을 왔다갔다 하며 가족으로 스며드는 시간을 가지다 집으로 데려와 5년 치 벌금을 내고 친자로 출생신고를 했다. 당시에는 관행이었고 지금은 불가능한 입양방식이다.
집에 온 근이는 6개월을 내리 울었다. 자다 오줌싸는 일도 잦았다. 몇 달을 정기적으로 오가며 낯을 익혔는데도 터전을 바꾸는 건 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변화였다. 분리불안이었다. 수녀님한테 가고 싶다는 말만 했다. 맞벌이를 포기하고 아이를 끌어안았다.
공개입양이란 단어를 듣기 힘든 시절이었다. 엄마아빠가 너를 낳고 다섯 살에 데려올 수 밖에 없었던 눈물 나는 콘티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놨었다. 신문에 공개입양단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찾아가서 만난 직후 비밀입양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근이를 데리고 입양모임을 쫓아다녔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근이가 유치원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엄마가 안 오면 병원에 안 간다고 주저앉아 울고만 있다고 연락이 왔다. 머리가 하얘진 채 달려가 병원에 입원시켰다. 시설에 있을 때 아프면 선생님이 약 주고 아이들하고 떼어놨는데 동네 아줌마들이 병문안 오고 엄마아빠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고 안아주니 아이가 좋아하는 게 눈이 보일 정도였다.
입원해 있는 일주일동안 시설에 있던 아이의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근이가 비로소 엄마아빠를 받아들였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입양모임을 계속 나가면서 아이에게 입양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이가 생모를 찾고 싶다고 했다. 왜 자기를 버렸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버려졌다'는 표현에 깜짝 놀랐다.
시설에서 준 기록을 다 보여줬다. 근이는 생후 한 달 반 정도 됐을 때 병원 내 벤치에서 발견된 아이였다. 버린 게 아니라 너를 키우다 어쩔 수 없는 환경 때문에 사람들 많은 안전한 곳에 놓고 간 것 같다고 말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제 삶의 긍정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