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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를 못 여는 꼬마, 그럴 수밖에 없던 사정

'업둥이'로 보육원에 온 아이의 운명... 입양으로 가족이 되다

등록 2023.08.11 18:57수정 2023.08.1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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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겨울, 칼바람이 살을 파고드는 칠흑 같은 밤. 그녀가 춘천의 어느 보육원 원장으로 일할 때였다. 퇴근해서 집에 있는데 원에서 전화가 왔단다. 얼굴을 꽁꽁 싸맨 젊은 엄마가 갓 낳은 아이를 안고 왔다고 했다. 

'거기 가만 계시라' 부탁하고 서둘러 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아기를 내려 놓고 생모는 사라졌다. 남은 쪽지에는 달랑 생년월일과 이름만 적혀 있었다. 아직 배꼽도 떨어지지 않은 태어난 지 5일 된 남자 아이였다. 

경찰에서 조사를 나왔지만 CCTV도 없던 시절이라 사라진 생모를 찾을 길은 없었다. 업둥이로 온 '욱이'는 그렇게 보육원 아이가 됐다.

지난 7월 18일 강원도 춘천 시내 카페에서 만난 박복순씨의 이야기다. 복순씨는 1959년생, 올해 나이 65세다. 그녀는 춘천에서 태어나 춘천을 떠나 산 적이 없는 토박이다. 대학에서 유아교육과 교육학을 전공하고 국공립어린이집에서 일할 때 IMF가 터졌다. 
 
 욱이엄마 박복순씨
욱이엄마 박복순씨김지영
 
민간과 공공을 가리지 않고 대대적인 정리해고 바람이 일었다. 남편은 시청 공무원이었다. 부부 중 하나는 나가야 했다. 박씨가 대신 나섰다. 

여성들은 결혼하면 전업주부로 들어앉는 시대였다. 서른에 결혼해서 딸이 하나 있었지만 일을 쉬고 싶지 않았다. 발달장애인 단체로 출근하면서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했다. 

나이 50에 보육원 사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원장님 공석을 이어받았다. 거기에서 꼬박 10년을 일했다. 아이들이 좋았다. 운동장에서 아이 우는 소리만 들려도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건 시간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욱이가 업둥이로 들어 온 그 해 줄줄이 다섯 아이들이 더 들어왔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1년에 한 명 들어올까말까 했는데 입양특례법이 시행되면서 강제 출생신고를 피해 유기되는 아이들이었다. 법의 사각지대에서 아이들이 희생되고 있었다. 


준비할 새도 없이 아이들이 왔고 기존에 있던 아이들까지 돌보느라 보육사 선생님들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다. 아예 사무실 직원들까지 야간 당직을 서야 했다. 시청에서는 느닷없는 상황에 당황했지만 예산 부족을 이유로 직원 보강을 해주지 않았다.

젖먹이 영아들만 10명 가까이 됐다. 평일에는 사무실 직원에 공익사회복무요원과 공공근로 아주머니들까지 동원해서 어떻게든 일손을 거들었다. 하지만 보육사 몇 명만 남은 주말에는 도저히 불가항력이었다. 


58세 남편, 3세 아이 입양을 원하다

하는 수 없이 주말이면 아이들 서너 명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러고는 남편과 딸에게 아이들을 맡겨 놓고 다시 보육원으로 출근했다. 욱이는 8개월 때부터 집으로 데려온 아이들 중 하나였다. 주말에 데려온 아이들은 잠들기 전에 '엄마'라고 부르는 보육사 선생님을 찾으면서 울었다. 그러지 않은 유일한 아이는 욱이였다.

남편도 딸도 주말마다 오는 아이들을 성가셔하지 않고 좋아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주말에 집에 데려오는 일이 드문드문 하면 남편은 오히려 아이를 데려오라 했다. 남편은 욱이를 무척 좋아했고 욱이도 남편을 신기하게 잘 따랐다. 언제부터인지 남편 마음 한자락에 욱이가 들어서고 있었다. 

딸도 아이들을 좋아했다. 방학 때 초등학생 여자 아이들을 열댓 명씩 데려와 재워도 불평 하나 없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반찬거리를 사 들고 와서 이것저것 요리하면서 즐기고, 자기 옷을 아이들에게 입혀보면서 즐거워했다. 

2015년 욱이는 세 살이었고 남편은 58세였다. 주말 마다 만나는 사이였지만 남편에게 욱이는 아내가 일하는 보육원 아이가 이미 아니었다. 어느 날 남편이 욱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했다.  
 
 박씨와 욱이
박씨와 욱이박복순씨 제공
  
하지만 박씨는 입양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손주뻘 되는 아이를 자식으로 삼을 자신도 없었지만 자신이 원장으로 있는 시설에서 자란 아이를 입양해서 자식처럼 키울 자신은 더욱이나 없었다. 그녀에게는 다른 두려움도 있었다. 

3년 전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감싼 채로 욱이를 시설에 놓고 간 생모가 언제든 다시 찾아와 아이를 달라할 것 같았다.  

선량하고 따뜻한 남편은 아내 박복순씨에게 입양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남편의 바람에 따라 욱이의 입양은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두려움을 완전히 이겨낸 결과는 아니었다. 그때는 그저 그랬어야 했다. 

그 해 7월에 입양신청을 했고 다음 해인 2016년 3월 확정 판결을 받았다. 보육원 아이였던 욱이는 그녀 아들이 됐다. 3년을 주말마다 집을 오고갔어도 시설에서의 집단생활이 남긴 생채기는 욱이에게 뚜렸했다.

냉장고 안에 있는 건 다 네 것이야... 그래도

욱이는 냉장고에 집착했다. 시설에 있을 때 방에 냉장고가 있었지만 그 문을 열 수 있는 권한은 보육사 선생님에게만 있었다. 그래야 시설에서의 집단생활이 유지될 수 있었다. 집에 와서도 욱이는 혼자 냉장고 문을 열지 않고 엄마에게 꺼내 달라고 했다. 대신 욱이는 냉장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안에 있는 건 다 네 것이라고, 언제든지 먹고 싶을 때 문을 열고 꺼내 먹으면 된다고 말해도 그 쉬운 것을 하지 못했다. 냉장고 문 하나 마음대로 열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의 마음이 이해가 되면서도 자정 가까운 시간에 우유 하나 꺼내 달라는 말에는 화딱지도 났다.

게다가 욱이는 거의 매일 이불에 오줌을 지렸다. 하루에 한 번이 아니라 다섯 번도 이불을 갈아 주기도 했다. 하는 수없이 방수커버를 침대에 씌웠다. 집이 생겼고 엄마아빠를 마음대로 부를 수 있어 너무 좋지만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욱이는 자신이 입양된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시설에 오게 된 경위도 물론이었다. 말하자면 다시 버려질 수 있다는 불안함의 발로였다. 오줌 지리는 습관은 초등학교 2학년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 마음의 생채기가 아물고 있었다.  

욱이는 학교 가기 전 나이였을 때 "낳아 준 엄마를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 때마다 좀 더 크면 꼭 같이 찾아보자고 대답해줬다. 그런 욱이가 어느 날은 자신이 시설에 맡겨진 이유가 '기저귀 살 돈이 없어서였을 거'라는 말을 했다. 저를 낳은 엄마에게 어쩔 수 없었던 아름다운 사연이 필요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또 안쓰러웠다. 

결혼해 분가한 딸은 욱이가 나중에 자기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걸 알고 받아들였다. 고맙게 사위도 마찬가지다. 욱이에게는 아빠 같은 매형이고 사위에게는 아들 같은 처남이다. 입양이 맺어 준 인연이고 가족이다. 

처음 집에 왔을 때 우리 나이로 겨우 네 살 먹은 아이가 혼자 샤워를 했다. 여느 또래 아이 답지않은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명색이 보육원 원장이었는데 아이들 면면을 다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런 아이가 지금은 매번 씻겨줘야 하는 5학년 아이로 변했다. 

모름지기 아이라면 그 일상을 부모와 가족이 주는 사랑과 보살핌으로 채워야 한다. 욱이는 지금은 누가보아도 사랑스러운 아이다. 

신뢰의 붕괴 그리고 또다른 신뢰의 회복

그녀가 시설에서 원장으로 있을 때, 아이를 맡겨 놓고 나중에 와서는 돈을 꿔달라는 부모가 여럿 있었다. 대개 아이를 맡긴 후 연락이 끊어지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크리스마스에 온다는 약속을 남기고 떠난 아빠를 기다리는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도록 아빠는 오지 않았다. 기다림이 사무쳐 자살 충동까지 이르게 된 아이와 함께 병원을 다녔었다. 다음에 온다는 부모 약속은 시설에 남겨진 아이에게는 오로지 살아가는 이유였다. 오겠다는 그 즈음이 되면 아이들은 담장 밖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은 송곳이 돼 아이 가슴을 찔렀다.

그런 경험이 있는 아이들에게 신뢰라는 단어는 힘을 잃었다. 그들이 신뢰를 다시 되찾는데는 더 많은 상실과 믿음에 대한 부단한 도전이 필요했다. 친권이 있는 아이들이 오히려 더 큰 상실과 불신의 경험을 겪어야 했다. 

처음부터 아예 친권이 없던 아이들은 이른 포기를 했지만 있는 아이들에게 포기를 먼저 가르칠 수는 없었다. 그런 마음들이 한데 모여 함께 사는 아이들에게 불신이라는 굴레를 씌웠다. 

욱이가 시설에서는 가질 수 없었던 부모에 대한 신뢰를 확신하는 데는 5년 여의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거기에서의 생채기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박씨가 욱이를 마음 속 깊은 곳에 자식으로 받아들이는 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낳든 입양하든 한 번 자식으로 삼으면 그냥 자식이었다. 이건 전혀 별개의 사건이고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그녀가 원장으로 있던 보육원에 생모가 놓고 간 아이가 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이 진실은 그대로 진실이되 그녀에게 욱이가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사실 또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다. 

입양은 가족이 되는 또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가족사진
가족사진박복순씨 제공
 
 
#입양 #공개입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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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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