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직장 내 괴롭힘 인정 못 받았다면, 산재 신청은 포기해야 할까?

[알아보자, LAW동건강] 업무상 스트레스가 존재한다면 정신질환에 대한 산재 인정될 수 있어

등록 2023.08.29 14:41수정 2023.08.29 14:41
0
 스트레스
스트레스Unplash

2019년 7월 16일 근로기준법의 직장 내 괴롭힘 금지 규정이 시행된 이후 4년이 지났다. 당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도 일부 개정되었는데, 직장 내 괴롭힘 등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질병들을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에 추가한 것이 골자다. 이제 노동자들은 직장 내 괴롭힘 등으로 인한 정신질환도 산업재해라는 점을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그러나 법 개정이 같은 시점에 이루어졌기 때문일까, 요즘 직장 내 괴롭힘과 정신질환의 산업재해 신청에 대해 오해하는 노동자를 종종 만난다. 대표적인 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산업재해 승인이 불가능하다'라는 생각이다.

직장 내 괴롭힘과 산재 신청

한 회사에서 수년간 재직한 A는 상급자와 동료 직원으로부터 따돌림을 경험했다. 전 직원이 함께하는 식사 시간에도 A의 몫은 다른 공간에 준비되었으며, 고객이 보내온 간식도 A만 배제한 채 나누어 주었다. 모든 규정이 유독 A에게만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문제 없는 업무처리에도 상급자의 질책이 수시로 쏟아졌다. 동료 직원이 회의 때 A와 함께 일하기 싫다며 발언하는 등 모욕감을 느낄만한 상황도 발생했다. 그런 괴롭힘은 1년 이상 지속되었다. 결국 A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고민 끝에 A는 따돌림에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한 직원을 가해자로 지목하여 사내 직장 내 괴롭힘 처리부서에 신고했다. 동시에 우울장애 등 상병에 대해 산업재해 신청도 진행했다. 다만, A가 경험한 괴롭힘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방법은 없었다. 부서 전체가 따돌림에 가담했기에 A에게 유리한 진술을 해줄 동료도 없었다. A가 괴롭힘이라고 느낀 모든 상황에 대해, 모두가 '우연히' 벌어진 것이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괜히 문제를 키운다며 조사 내내 미온적 태도로 일관한 회사는 몇 가지 확인된 사실에 대해 A가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라며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A는 억울했지만, 재차 다투기엔 너무도 소진되어 포기했다. 산업재해 역시 인정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여 기억에서 지웠다.

그런데 얼마 후, A의 산업재해 신청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었다.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 판단 기준과, 산재보험법상 업무상 재해 판단 원칙에 근거해 A의 사정을 살펴보면, A의 정신질환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된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업무상 재해 판단 기준은 '재해자'

먼저 근로기준법은 우위성, 업무상 적정범위, 신체적·정신적 고통 등 요건을 살펴 직장 내 괴롭힘 행위를 판단한다. 나아가 문제 된 행위로 인해 신체적·정신적 고통이 발생하였는지는 신고인이 아닌 보통 평균인을 기준으로 한다.
 
근로기준법 제76조의2(직장 내 괴롭힘의 금지)
사용자 또는 근로자는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이하 "직장내 괴롭힘"이라 한다)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고용노동부 직장 내 괴롭힘 예방·대응 매뉴얼 (2023.04.) p.48
당사자의 관계, 행위가 행해진 장소 및 상황, 행위에 대한 피해자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인 반응의 내용, 행위의 내용 및 정도, 행위가 일회적 또는 단기간의 것인지 또는 계속적인 것인지 여부 등의 구체적인 사정을 참작하여 종합적으로 판단하되, 객관적으로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일반적이고도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신체적·정신적 고통 또는 근무환경 악화가 발생할 수 있는 행위가 있고, 그로 인하여 피해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 또는 근무환경의 악화의 결과가 발생하였음이 인정되어야 함

반면, 산재보험법은 업무상 재해를 인정함에 있어서의 기준을 재해 당사자의 건강과 신체조건으로 본다. 재해자 개인의 민감성 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으로 재해자의 성향이 정신 질환에 다소 취약하더라도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상병 발병이라면 산업재해로 인정될 수 있다는 취지다.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는 사회 평균인이 아니라 질병이 생긴 근로자의 건강과 신체조건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대법원 2017.8.29. 선고 2015두3867 판결

이 차이를 토대로 A의 경험을 살펴보면, '평범한 상황에 대해 A가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이라는 조사 결과는 A의 상병이 산업재해가 아니라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당해 조사가 객관적으로 이루어졌는지, A가 경험한 집단 따돌림 양태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진실은 알 수 없다. 적어도 A가 일터에서의 상황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로 인해 정신질환이 유발되었음은 명확했다. 그렇기에 A가 경험한 일이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은 아닐지라도, 산재보험법의 판단 원칙에 따라 A의 상병을 산업재해로 주장할 수 있다.


일터에서의 정신질환, 원인은 업무 스트레스들

나아가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질환에 대한 산업재해 판단과정은, 재해자의 업무와 일터에 정신질환을 유발할 수 있는 업무 스트레스가 존재했는지, 그리고 이에 노출되었는지를 전반적으로 살피는 과정이기도 하다. 단순히 직장 내 괴롭힘 인정 여부에만 기초해 이루어지지도 않으며,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

법률상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되지 않았을지라도 재해자가 부당하다고 느낀 상황이 일터의 구조적 문제나 업무의 특성 등에 기인한 것은 아닌지, 괴롭힘은 아닐지라도 업무 수행에 있어 과도한 책임이나 부담이 가해지는 등 업무 스트레스가 가해진 사정은 없는지, 재해자가 겪은 스트레스 상황에 대해 회사가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혹시 회사가 문제해결은 미룬 채 괜한 일을 키운다며 미온적 태도로 일관한 것은 아닌지 등 재해자와 일터의 사정 전반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결론적으로,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업무상 스트레스가 존재한다면 정신질환에 대한 산업재해는 인정될 수 있다.

그럼에도 재해자들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되지 않으면 산업재해 승인이 안 되나요?"라는 질문을 던질 때, 쉽게 답하지 못하고 있다. 머리에서는 '두 사안은 독립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를 외치고 있으나, 마음 한편에서 "직장 내 괴롭힘 신고는 안 하셨네요",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되진 않았네요"와 같은, 질판위에서 받았던 질문들을 떠올리며 망설이기도 한다. 이제, 머뭇거리지 않고 답변할 수 있다면 좋겠다. 

"중요한 것은 업무 스트레스입니다. 직장 내 괴롭힘 인정 여부가 아닙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이성민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이자 공인노무사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23년 8월호에도 실립니다.
#직장내괴롭힘_산재
댓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모든 노동자의 건강하게 일할 권리와 안녕한 삶을 쟁취하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이러다 12월에 김장하겠네... 저희 집만 그런가요? 이러다 12월에 김장하겠네... 저희 집만 그런가요?
  2. 2 [단독] 쌍방울 법인카드, 수원지검 앞 연어 식당 결제 확인 [단독] 쌍방울 법인카드, 수원지검 앞 연어 식당 결제 확인
  3. 3 "무인도 잡아라", 야밤에 가건물 세운 외지인 수백명  "무인도 잡아라", 야밤에 가건물 세운 외지인 수백명
  4. 4 "윤 대통령, 매정함 넘어 잔인" 대자보 나붙기 시작한 부산 대학가 "윤 대통령, 매정함 넘어 잔인" 대자보 나붙기 시작한 부산 대학가
  5. 5 악취 뻘밭으로 변한 국가 명승지, 공주시가 망쳐놨다 악취 뻘밭으로 변한 국가 명승지, 공주시가 망쳐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