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한테 물어요.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병원에 함께 간 한 지인이 간호사에게 한 말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야~호~" 소리를 질렀다. 내가 몸이 아파서 가족이나 지인과 함께 병원에 가면, 당사자인 나에게 묻지 않고 함께 간 사람에게 묻는 경우가 많다. 휠체어를 타는 나는, 종종 보이지 않는 인간, 투명 인간의 삶을 겪는다. 무시와 모욕의 삶 말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무시와 모욕을 종종 접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그것에 반응하며 저항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상황을 포착하지 못할 수도 있고, 인식했음에도 그것을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때론 무시와 모욕의 행위에 대한 갑론을박이 펼쳐지기도 한다.
무시는 일상적으로 경시, 괄시, 외면 등과 함께 혼용하여 쓰이고, 모욕(侮辱)은 깔보고 욕되게 하는 것이다. 모욕은 치욕, 욕, 수모, 부끄러움 등과 의미가 겹쳐진다. 무시와 모욕이라는 두 단어는 얕잡아본다는 의미가 포개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상에서는 이 두 단어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아비샤이 마갈릿(Avishai Margalit)은 <품위 있는 사회>에서 무시와 모욕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람을 '무시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또한 사람을 인물로 보지 않고 배경으로 보는 것도 무시하는 방식이다. 즉 무시는 사람을 보지 않는 상황이며, 더 정확히 표현하면 '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상황'이다.
그리고 모욕은 "인간을 인간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 단순한 물건이나 도구, 동물, 인간 이하 혹은 열등한 인간에 불과한 것처럼 대우하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사람을 도구, 동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도구와 동물처럼 대우한다는 것이다. 마갈릿의 모욕의 개념은 존중과 상반된다.
이제 학교를 들여다보자. 특히 통합학급에서 발달 장애를 겪고 있는 학습자가 학습의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학습의 장에서 장애를 겪는 학생이 투명 인간의 대우를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교과서가 없어도 괜찮고, 책을 펴지 않아도 상관없으며, 시험 성적도 의미 없는, 그냥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존재로 말이다. 이러한 무시와 모욕의 현상은 학교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로 이어진다.
필자는 친구와 함께 자동차 대리점에 간 적이 있다. 내가 차 견적을 뽑아보려고 한다고 말하자, 매장 직원은 차의 성능, 할부 조건, 신차 이벤트에 대해서 주로 친구에게 설명한다. 그의 시선은 나와 마주치기도 하지만 순간적으로 지나간다. 기가 막히는 일이다. 대리점을 나온 나는 울분을 토한다. 친구는 "무시는 무슨, 내가 더 부자로 보였겠지, 하하하, 그러니까 담엔 걸어서 가". 그렇다. 두 발로 걸어야만 손님 대우를 받는다.
오래전에 휠체어를 타는 학생들과 함께 식당에 갔는데(나는 목발을 짚고),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식당 주인이 물었다. "어서 오세요"가 아니라 "어떻게 오셨어요?"라는, 반갑지 않은 불청객에 대한 그들의 냉소적 응대에 할 말을 잃는다. 이러한 차별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놀랍지도 않다.
아래의 인용문은 발달 장애를 겪고 있는 혜정이와 혜정이 언니가 혜정이의 활동보조서비스(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의 활동을 돕는 사람을 고용하고, 그 비용을 국가가 대부분 책임지는 제도를 말한다)를 신청하고 심사를 받기 위해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담당 직원과 나눈 대화의 일부분이다.
그는 곧바로 혜정이가 아닌 내게 질문을 던졌다. 처음부터 혜정이에게 의사소통 능력이 없다고 간주한 것이다.
"이것 보세요. 넘어졌어요."
대화 도중 혜정이가 갑자기 끼어들어 며칠 전 길을 가다 넘어져 생긴 상처를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혜정이 말에 별다른 반응 없이 내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장혜영, 2021: 158).
우리가 '사람을 열등한 인간으로 대우하는 것'을 모욕 개념 중에 하나로 받아들인다면, 대화를 나누어야 할 당사자가 눈앞에 있는데도 처음부터 당사자에게 묻지 않고 동행한 사람에게 묻는 것은 모욕이다. 대화 상대자로서 인정하지 않으며,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것이라는, 즉 열등한 인간이라는 편견을 드러내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안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혜정이가 "이것 보세요. 넘어졌어요"라고 말을 걸지만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는다. 이는 모욕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대화 상대자뿐만 아니라 대화의 영역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도 헤아려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것이 함께 사는 사람에 대한 예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방식, 대화 양식, 관계 맺는 방식이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때때로 예외가 된다. 상대가 비장애인이라면 하지 않을 말과 행동을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간 이하의 대우를 하는 것이다. 즉 비장애인이라면 쉽게 꺼낼 수 없는 말을 장애인에게는 아주 쉽게 묻는다.
필자의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자주 가던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들과 함께 병원 입구에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는데, 병원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난데없이 나에게 물었다. "아저씨, 생활비는 나오는 곳이 있습니까?" 리베카 솔닛이라면 "그런 것을 왜 물어요?"라고 응답했겠지만 나는 어정쩡하게 그 순간을 피했다.
나는 살면서 낯선 사람에게 그런 질문을 대놓고 해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왜 누군가는 나에게 망설임도 없이 그런 말을 뱉는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에서 낯선 누군가의 삶이 궁금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함부로 말을 걸지는 않는다. 휠체어를 타는 나는 때때로 응대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는다.
이제, 우리의 시선을 특수학교로 옮겨보자.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온 교사가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선생님, 철수가 농담이 돼요. 하하하. 학교장이 졸업식장에서 이렇게 축사를 한다. 여러분, 참 대단합니다. 격려라는 말도 알고, 졸업하는 선배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여러분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무시와 모욕으로 오염된 언어가 특수교육 현장에서 무의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장애를 겪는 학생을 열등한 존재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을 거두어들이는 실천이 필요하다.
필자는 교실에서 특수교육 교사와 특수교육실무사(특수교육 대상 학생들의 학습과 생활을 지원하는 사람)가 쉬는 시간에 교실에서 특정 학생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 내용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두 선생님은 그 해당 학생이 수업 시간에 교사와 어떤 갈등을 겪었는지, 급우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심지어 화장실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등의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 학생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데도 말이다.
이는 모욕이다. 장애를 겪는 학생은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대화의 내용을 당사자가 또는 급우들이 듣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마치 장애를 겪는 학생 당사자는 생각도 감정도 없는 것처럼 대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이 정신질환자와 그 외 재소자들의 사회적 상황을 다룬 <수용소>에서, 자아와 관련된 정보 영역에 대한 침해를 모욕으로 간주한다. 불명예스러운 사실들이 열람되고 노출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모든 교육 현장에서 장애 해방을 꿈꾼다. 내 꿈이 실현되리라 믿지는 않지만, 그 꿈을 위해 우리 모두의 몸에 들러붙어 있는 무시와 모욕의 시선을 떼어내는 노력은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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