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몰된 뽕나무밭문의면 보도연맹원이 학살된 뽕나무밭. 지금은 대청호가 있다.
박만순
"얼릉 갔다 올게. 잘 놀고 있어" 우천성(1912년생)은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막내 유순을 번쩍 안고 눈을 맞추었다. "아빠 어디 가는데?" "응 잠깐 면 소재지에 갔다 올 테니, 엄마 말 잘 듣고 있어!"
조금 전 작업복 차림으로 부리나케 집으로 와 햐얀 중의적삼으로 갈아입은 우천성은 딸 유순에게 따듯한 체온만 남긴 채 집 싸리문을 나섰다.
우천성은 괴곡리 우기미 마을 어귀에서 동생 석준(1922년생)을 만났다. 석준은 형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형님도 면 소재지에 가십니까?" 우천성·석준 형제는 부지런히 걸어 충북 청원군(현재의 청주시) 문의면 소재지의 금융조합으로 갔다. 농협의 전신인 금융조합 창고에는 관내 보도연맹원 약 50명이 지서의 연락을 받고 모여들었다.
어두컴컴한 창고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한여름이라 땀이 삐질삐질 흘렀지만 공기가 심상치 않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면 소재지인 미천리에 사는 김씨가 옆 사람에게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이야기했다.
"지서에 갇혀 있던 죽암리 사람 4명이 고은삼거리 방향으로 끌려갔다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먼저 모인 이들은 피반령으로 끌려갔다는데..." 훗날에야 밝혀진 일이지만 문의면 죽암리 보도연맹원 7명 중 4명은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에서 학살됐고, 문의면 1차 소집자들은 청원군 가덕면 피반령고개에서 군경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진실화해위원회, '청주·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 <2008년 하반기 보고서>)
"어떤 놈들이 떠드는 거야!" 경찰의 호통에 50여 개의 입이 순간적으로 봉해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들은 광목천과 철사로 뒷결박을 당한 채 트럭에 실려 문의면 덕유리 광원마을 뽕나무밭으로 이송됐다. 구금장소에서부터 '인간 사냥터'까지는 8km 거리였다.
그곳에는 전날 주민들을 동원해 파놓은 구덩이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군인 간부의 지시에 따라 총구에 불이 붙자마자 보도연맹원들이 짚단 쓰러지듯 쓰러졌다. 1980년에 완공된 대청댐으로 인해 현재는 물속으로 마을이 가라앉아 그 흔적조차 알 수 없는 광원마을 뽕나무밭의 사연은 역사에서 거의 잊혀졌다.
수몰돼 푸른 강물만이 흐르는 덕유리 광원마을 비극이 발생한 것은 1950년 7월 13일 오전이었다. 뽕나무밭의 화약 냄새가 채 가라앉기도 전인 그날 오후 인민군이 청주시에 입성했다.
즉 대한민국 군경은 후퇴하기 몇 시간 전까지 '단 한 명의 보도연맹원이라도 씨를 말리겠다'는 일념으로 자신들의 악역을 맡았던 것이다.
뽕나무밭의 비극
김육현(1914년생)은 남편 우천성의 시신을 찾기 위해 광원마을 뽕나무밭으로 내달렸다. 배부른 시신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한여름이라 시신들은 급속히 부패돼 배는 부풀어 오르고 얼굴은 썩어 문드러졌다.
공동묘지로 변해버린 뽕나무밭에서 정신줄을 놓은 김육현은 몇 번이나 시신을 뒤적였으나 결국 남편을 찾지 못했다. 썩은 시신에서 나온 악취로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가 나올 것 같은 것보다는 내 남편 찾기 위해 남의 시신을 훼손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앞섰다.
우천성·석준의 형 우석범도 집안 사람들과 함께 동생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한참 만에 석준의 시신을 찾았는데, 모두가 입을 막았다. 총상으로 인해 크게 훼손됐기 때문이다.
유기분(1924년생)은 우석준의 시신을 수습해 문의면 괴곡리 뒷산에 묻었다. 아버지가 영원히 땅속에 묻히던 순간, 딸 순자(1946년생)는 집에 혼자 있어야만 했다. 집안 어른들이 어린 순자에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참혹한 모습으로지만 시동생은 시신을 수습했는데, 남편 우천성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김육현은 '혹시나 남편이 뽕나무밭에서 죽지 않고 어딘가에 살아 있지나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사방팔방을 다녔다.
그런데 하루는 면 소재지에 있는 무당이 "물명당(물가 명당)에 잘 묻혔으니 찾지 마라"는 점괘를 내놓았다. 문의면 보도연맹원 학살이 저질러진 덕유리 광원마을 뽕나무밭 근처는 신탄진으로 통하는 오가리강이 있었기에, 남편도 결국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충북 청원군 문의면 괴곡리 우기미 마을 2명, 죽암리(1973년에 현도면으로 편입된) 7명을 포함해, 약 50명의 보도연맹원이 학살된 배경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