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현황 지도당시 사건 현장에 대한 항공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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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대표적인 산악지역인 경북 봉화군과 안동군(현재의 안동시)에서는 일찍부터 빨치산이 활동했다. 특히 봉화군 명호면과 재산면, 안동군 연안면에 위치한 청량산은 빨치산 활동의 주 무대가 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전쟁 전부터 청량산 주변에서는 빨치산과 군경의 교전이 빈번했다. 1949년 6월 17일 새벽, 재산면사무소와 재산지서가 빨치산들에게 기습 점거되었다는 급보를 받은 지용호 봉화경찰서장은 경찰 20여 명과 대한청년단원 등 50명을 인솔, 트럭 2대에 분승하여 현지로 출동했다.
출동하던 봉양경찰서 지용호 서장 일행은 봉성면 봉양리 미륵재에서 빨치산 200여 명의 기습공격을 받아 경찰관 3명과 청년단장 등 4명이 총탄에 맞아 희생되었다. 이 와중에 지용호 서장도 목숨을 잃었다.
빨치산의 공격을 피해 안동 방향으로 도주하던 재산지서 경찰은 동계천을 앞두고 안동군 예안면 고가무 앞에 다다랐다. 거꾸로 재산지서가 습격받았다는 정보를 접한 안동 청년방위대도 출동을 했다. 청년방위대는 대한청년단의 준군사 조직으로 국민방위군의 전신이었다.
동계천을 사이에 둔 북쪽의 재산지서 경찰과 남쪽의 청년방위대가 전투 경험이 미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불과 600미터 거리에 위치한 상대방이 적군인지, 아군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경찰이던 군인이던 전투대형에서는 정찰병(첨병)을 먼저 세우고 본대와 무전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이날의 재산지서 경찰과 안동 청년방위대는 이런 기본적인 전투수칙도 지키지 않았다. 육안으로도 적아를 구분할 수 있는 거리임에도 잔뜩 긴장한 탓에 앞뒤 가릴 것 없이 상대방을 적군으로 오인(誤認)한 것이다.
무장한 상대방은 그렇다 치더라도 논에서 모내기하던 권영찬 가족 일행에게 총질을 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작 피해 당사자인 권영찬은 "당시 군경이 우리 가족을 빨갱이(빨치산)로 오인한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군경 대치선의 중간지점에 있던 이들은 서로에게는 약 300미터의 거리에 있었다. 그렇다면 육안으로도 쉽게 민간인인지, 빨치산인지 구별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모내기하는 농민들을 빨치산과 혼동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결론은 민간인인줄 알면서 총질을 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즉, '작전 지역에서 움직이는 것은 무조건 적이다'라는 인식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작전지역의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리는 조치가 먼저 취해져야 했겠지만, 그런 조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구덩이 바로 앞에 세워진 아홉 명의 청년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모내기하다가 낭심에 총을 맞은 소년 권영찬은 예안면 소재지의 서아무개 의원으로 갔다. 하지만 서 의사는 치료 부위에 아까장끼(머큐로크롬)만을 바르고 손을 내저었다.
더 큰 병원으로 가라는 것이다. 권영찬은 안동에 있는 도립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다. 소년의 할머니가 병간호를 했지만, 소년의 병원 생활은 마냥 불안하기만 했다. 비록 병원이 안동 읍내 한가운데 있었지만, 밤에 병실에 불도 켤 수 없었다.
빨치산이 출몰한다는 이유였다. 병원에서는 소년에게 퇴원하라고 아우성쳤다. 제대로 병 치료도 못한 소년은 한 달 만에야 어쩔 수 없이 퇴원을 해야 했다. 약을 타와 집에서 자가 치료를 하니 제대로 치료가 될 수 없음은 당연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1년 만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안동지역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39일 만인 1950년 8월 3일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안동에서도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토지개혁, 의용군 모집, 식량 공출 등이 이루어졌다.
권영찬은 소년단에 소속되어 여성동맹원들에게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배웠다. 그보다 3~4세 위 선배들은 민청(민주청년동맹)에 소속되어 쌀과 부식 등을 운반하는 등 인민위원회와 인민군의 심부름을 했다.
그해 가을, 수복한 군경에 의해 이런 행위는 이적행위로 간주되었다. 수복 후 군경은 마을 청장년들을 모래사장에 세워놓았다. 사실 모래사장에 세워진 청·장년들은 인공 시절 감투조차 쓰지 못했던 이들이다. 정작 감투를 쓴 이들은 인민군을 따라 월북을 했고, 남은 부모와 아내, 자식들은 공개총살의 타깃이 되었다.
이들 9명은 일렬횡대로 세워졌다. 당시 오일장에 나왔던 주민들이 호기심 반, 강제동원 반으로 모래사장 주위에 둘러섰다. 군인들은 면소재지 청년들을 동원해 아홉 개의 모래 구덩이를 팠다. 구덩이 바로 앞편에 아홉 명의 청년이 세워졌다.
정식적인 재판이고 뭐고 일체 요식 행위는 없었다. 단지 피의 제전(祭典) 준비가 마무리되자 군 장교는 들었던 손을 아래로 향했다. 앉아쏴 자세를 취한 군인들의 방아쇠에 걸린 손만이 움직였다. 탕탕탕하는 소리와 함께 젊은이들의 목과 무릎이 꺾이었다. 동시에 그들의 몸뚱이는 사전에 파놓은 모래 구덩이로 쑤셔 박혔다.
살육 현장은 다시 모래로 뒤덮였고, 선연한 핏자국만이 당시의 참혹한 현장을 증언했다. 주민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 이 사건은 쉽게 수습되지 않았다. 군경이 죽은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게 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마을 개들이 피 냄새를 맡고 모래 구덩이를 파헤쳐 시신들을 물고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그의 삶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