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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노동은 어떻게 과로를 초래하는가

[아시아 과로사통신] 모순적인 만남, 불안정노동과 과로노동

등록 2023.12.26 09:48수정 2023.12.26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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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노동과 과로노동을 주제로 글을 쓰려다 보니 제목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불안정노동과 과로노동은 논리적으로 서로 모순적인 개념이라 자석의 같은 극처럼 만나면 밀어내야 하는데, 일의 세계에선 마치 S극과 N극처럼 서로 달라붙으려 하기 때문이다.

불안정노동은 노동을 하지만 안정되어 있지 못하고 불안정한 상태를 의미한다. 비정규직처럼 고용이 불안한 노동을 포함하며 고용형태와 관계없이 저임금 노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양한 불안정노동의 공통점은 일해도 빈곤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편, 과로노동은 일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과로'에 이르는 노동을 의미한다. 육체적 피로는 물론 정신적 소진에 이를 수 있으며, 자칫 목숨을 잃기도 한다. 과로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고용노동부 고시는 과로로 인한 업무상 질병의 인정기준을 예시로써 들고 있는데, 노동시간을 비롯해 업무 강도, 책임 등 다양한 업무부담 가중요인을 제시하고 있다.

불안정노동과 과로노동이 양립하는 게 어려운 건 불안정하게 일하면서 장시간 일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불안정노동의 대표적인 유형은 정규노동과 비교해 기간이 짧거나(기간제), 노동시간이 짧거나(단시간), 아니면 아예 정해진 노동시간이 없는 건별로 일하는(특수고용) 비정형의 경우를 모두 포함하는데, 이들 일자리의 특징은 장시간 노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게 보면 불안정노동자가 과로노동을 할 이유가 없지만, 현실은 다르다. 불안정노동자들은 불안정한 일자리 때문에 더 많이 일해야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a  낮은 수수료 구조에서 특수고용노동자는 생계유지를 위해 더 많은 물량을 받아 일하게 되고, 이는 과로노동으로 이어진다.

낮은 수수료 구조에서 특수고용노동자는 생계유지를 위해 더 많은 물량을 받아 일하게 되고, 이는 과로노동으로 이어진다. ⓒ 전국택배노동조합

 
특수고용노동자의 과로노동

대표적인 형태가 특수고용노동자다. 특수고용노동자의 과로노동은 수수료와 관련되어 있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은 건별 수수료를 받고 일하는 인적용역 계약을 체결한 노동자로, 대부분의 경우 수수료는 계약 상대방인 회사가 일방적으로 정한다.

특수고용노동자는 임금을 정당하게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근로기준법상 임금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최저임금을 보장받지 못하며, 노동조합이 조직된 경우도 많지 않아 적정 수준의 시장임금을 적용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손이 부족하면 일시적으로 수수료가 올라갈 수 있지만, 지금처럼 노동력 공급이 많은 상황에서는 수수료가 낮게 책정되기 마련이다. 낮은 수수료 구조에서 특수고용노동자는 생계유지를 위해 더 많은 물량을 받아 일하게 되고, 이는 과로노동으로 이어진다. 야간노동을 하는 택배 노동자와 물류센터 노동자들이 과로사했다는 기사를 종종 접하게 되는데, 이는 야간노동과 과로노동이 상호작용을 한 결과이다.


특수고용노동자가 과로노동을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사용자의 오남용과 관련되어 있다. 특수고용노동자는 근로기준법상 임금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계약 당사자인 회사는 특수고용노동자를 임금노동자처럼 활용해서는 안 된다. 업무지시나 기타 종속적 관계를 형성해서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업 다수가 특수고용노동자와 인적 용역계약을 체결한 뒤, 마치 직원처럼 일을 시킨다. 업무를 배정하기도 하고, 업무를 잘하도록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주며 심지어 업무를 위한 교육훈련도 제공한다. 노동시간만 주 최대 52시간을 적용하지 않을 뿐이다. 특수고용노동자와는 물량 단위 용역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주 52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을 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조선업을 포함해 제조업의 많은 곳에서 생산직 노동자는 프리랜서라는 이름으로 회사와 용역계약을 체결하고 고용된 뒤, 시간 외 수당 없이 잔업과 특근 등을 하고 있다. 주 52시간을 훌쩍 넘어 일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법원이 사용자의 특수고용 오남용을 바로 잡기 위한 판결을 지속해서 내리고 있는 점이다. 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해 근로기준법상 임금노동자로 인정한 사례는 올해만 해도 여러 건이다. 가전기기 방문점검원, 온라인 배송기사, 조선소 취부 용접사가 근로기준법상 임금노동자로 인정받았다. 근래 조선소에는 재하도급인 물량팀이 늘어 프리랜서 고용이 많아지고 있는데, 올해 11월 대법원의 조선소 프리랜서의 임금노동자 판결은 이후 조선소의 고용관계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처럼 매해 적어도 2~3개 직종의 특수고용노동자가 임금노동자로 인정받고 있으나, 정부는 이러한 오분류를 바로 잡을 구체적인 문제해결 계획이 없다. 오히려 조직적 힘이 부족한 소규모사업장과 특정 직종을 대상으로 노동시간 유연화를 시도하려고 한다. 취약 노동자 권리를 보호할 책임이 국가에 있지만, 오히려 약한 자에게 더 가혹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당혹스럽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정흥준 님은 한노보연 회원으로 노동시간센터에서 활동 중입니다. 이 기사는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12월호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불안정노동과로 #특수고용노동자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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