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 봉기대뫼마을 사발통문을 작성한 집 담벽에 그려진 박홍규 화백의 고부 봉기.
이영천(촬영)
박원명이 잔치에 참여해 백성과 술과 음식을 나눈다. 이틀 후에는 따로 봉기군에서 이탈한 사람을 위로하는 잔치를 연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봉기군이 순식간에 와해돼 버린다. 임시방편적 유화 조치가, 신념이 취약한 봉기군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 셈이다.
고부군(구 지명, 현 정읍시·고창군) 백성에겐 경계를 넘어 반란을 일으킬 의지가 아직 부족했다. 새 세상을 열어야겠다는 신념도 약했고, 두 달여 간 봉기에 대한 피로감도 쌓였다. 무엇보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농사철이 봉기군 와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기회주의자의 등장
한편, 안핵사(조선 후기 지방 사건처리를 위한 임시직 정부 관리)로 임명된 이용태는 보름 가까이 장흥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다 박원명이 고부에 부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역졸 800명을 이끌고 고부 가까운 입암 천원역에 웅크리고 있었다. 봉기군이 해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역졸을 몰아 점령군처럼 고부에 들어온 그가 저지른 악행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이용태는 봉기군이건 아니건, 남자라면 무조건 잡아들였다. 남자 그림자도 찾을 수 없게 된 마을에 이제 역졸(역노비)들이 도둑으로 변한다. 귀천을 가리지 않고 집마다 들이닥쳐, 돈이 될 만한 물건과 재물을 빼앗고 훔쳐 간다. 그다음 여자들을 겁탈하기 시작한다. 무력과 완력에 무기력하게 당한 고부는 동네마다 난리가 났고, 통곡으로 날이 새고 밤을 보냈다.
이용태라는 끔찍한 악마의 숨결이 온 고을을 할퀴고 난도질하며 겁탈했다. 봉기군으로 나간 남자가 없으면, 대신 여자를 묶어 관아로 끌어갔다. 마을마다 불을 질러 고부가 불바다로 변해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인근 태인과 정읍, 흥덕까지 휩쓸고 다니며 노략질을 일삼았다. 일대 백성은 물론 부자와 유학자까지 끌끌 혀를 찰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