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창고 앞바다자은면 우익들이 수장된 남진창고 앞바다. 자은국민학교(초등학교) 선생이었던 김희철은 이곳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박만순
'삐걱'하며 열린 창고 안에는 자은면 유지들이 대부분 와 있는지 "김 선생 왔는가?"하며 인사치레를 했다. 그렇다고 무슨 반가운 자리도 아니고 인사가 길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초조한 눈빛으로 눈인사만 나눌 뿐이었다.
"종남이 아버지가 이럴 줄은 몰랐네"라고 한 이는 자은면 청년단 단장을 하고 있는 이였다. 옆에 있는 이가 "완장이 죄지, 사람이 뭔 죄가 있당가"라며 선문답을 했다.
여기서 종남이란 자은지서 앞에서 있었던 1948년 3.1절 기념시위 때 주동적인 역할을 한 일로 영암 월출산에 은거하고 있다가 6.25때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박종남을 말한다. 그는 한국전쟁이 나자마자 광주에서 다른 재소자와 함께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이런 연유로 박종남의 아버지는 인공세상이 되자 자은면의 인민위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행정을 맡은 형식상의 자은면 수장일 뿐 우익인사를 붙잡아 들이는 분주소(지서) 일에 관여할 수는 없는 위치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역할과는 달리, 남진창고에 갇힌 자은면 유력인사들은 박종남의 부친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평소에 얼굴 붉힌 일도 없고 지역 일을 서로 상의하고 협력해왔던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인공 세상이 되고 지방 좌익이 판치는 세상에서 박종남 아버지는 남진창고에 갇혀 있는 인사들을 외면했다. 속마음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겉으로 특정 개인의 편의를 봐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1950년 10월 2일 목포에 국군이 입성했다는 소문이 바람결에 들려왔다. 남진창고에 갇혀 있던 이들의 입에서 '휴'하는 안도의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은 때 이른 것이었음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아 확인되었다.
김희철 부부가 남진창고에 갇힌 다음 날 식전부터 완장 찬 이들이 동분서주했다. 창고에 갇힌 이들을 끌어내더니 몽둥이와 죽창으로 때리고 쳤다.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른 이들에게 커다란 돌맹이 한 개씩을 가슴에 안겼다. 바다에 수장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열 명씩 나룻배에 실릴 때 김희철 부부는 같은 배에 실렸고, 김희철 뒤에 그의 아내가 앉혀졌다. 배가 선착장을 출항하자마자 김 교사의 아내는 이빨로 남편의 뒷결박을 풀기 시작했다. 표나게는 할 수 없는 일이어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조금씩 했다.
드디어 뒷결박이 풀어졌을 때 김희철 부부는 바다로 헹가래 쳐졌다. 똑같이 바닷속에 빠졌지만 손이 자유로웠던 김희철은 헤엄쳐 나온 후 암태도 승봉산에 숨었고, 그의 아내는 남진창고 앞바다 물고기 밥이 되었다. 김희철은 아내 덕분에 살아난 이후 1961년도에 제23대 자은면 면장이 되었다.
인간 지옥이 된 염전 탱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