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리 주민 100여 명이 수비대에게 몰매당한 장소의 팽나무
박만순
그 충격적인 사건이 있은 지 불과 며칠 되지 않은 시점에 자은면 와우마을 사람들을 마을에 있는 사장(射場)에 전부 집결시켰을 때부터 표복암은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6.25 당시 와우마을은 약 100호가 살았는데 신창 표씨(新昌表氏) 집성촌이었다. 수비대는 1950년 10월 중순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전부 사장에 집결시켰다.
그런 후에 팽나무 아래 의자를 놓더니, 책임자인 듯한 청년이 그곳에 앉아 주민들을 일일이 심사했다. 소위 부역자와 그의 가족은 오른쪽으로 가게 하고, 나머지는 왼쪽에 서게 했다.
사실 수비대들은 부역혐의자들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도 없을뿐더러 객관적인 기준도 없었다. 그냥 소문에 의해 '누구네 집 자식이 인공 때 활동했다더라'는 이야기와 6.25 이전에 사감(私感)이 있었던 이들을 오른쪽에 서게 했을 뿐이다.
최종적으로 100여 명의 주민이 오른쪽에, 200여 명이 왼쪽에 서게 됐을 때 책임자가 뒤에 서 있던 청년들에게 무어라 지시했다. 그러자 그때부터 오른쪽에 서 있던 이들을 향해 수비대 청년들이 덤벼들었다. 나이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몽둥이찜질이 시작됐다. 비명을 지르는 이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몽둥이질이 이루어졌다.
'비명을 지르면 손해구나'라고 머리는 인식했지만 머리와 허리, 엉덩이, 배를 향해 사정없이 밀고 들어오는 몽둥이질에 주민들은 무의식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왼쪽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의자에 앉아 있던 수비대 책임자가 왼쪽에 서 있는 한 여성의 머리를 몽둥이로 내리쳤다. 그 여성은 시아버지가 몽둥이질을 당하는 것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을 뿐이다. 그런데 수비대 책임자는 그 여성에게 본때를 보인 것이다.
100여 명에 대한 몽둥이찜질은 종일 이루어졌고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멈추었다. 광란의 춤이 벌어지는 동안 이 상황을 묵묵히 지켜본 것은 400년 된 팽나무였다.
팽나무가 있는 사장은 와우마을 사람들의 공동놀이터였다. 조선시대 때부터 있어 온 이 사장에서 명절마다 마을 주민들이 그네도 타고 사물놀이도 했다. 일제강점기부터는 축구와 배구를 하기도 했다. 그런 주민들의 공동놀이터이자 쉼터인 사장이 주민들을 지옥으로 빠뜨리기 위한 공간으로 변질된 순간이었다. 주민들의 수난을 사장에 있는 팽나무는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커다란 구덩이 4개... 생매장 당한 주민들
표재진은 사장에 거의 반송장이나 다름없이 쓰러져 있는 아버지 표복암을 업어서 집으로 모셔왔다. 표재진(1914년생)은 그날부터 뒷간에 가서 맑은 똥물을 건져 왔다. 예전부터 민간에서 전해져 내려온 치료법으로 골병든 이들, 특히 매를 맞은 이들에게 똥물이 직효라는 설에 따라 아버지에게 매일 똥물을 먹인 것이다. 또한 표복암의 손녀 표정애(당시 11세)도 할아버지를 정성껏 간호했다. 그렇게 해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약간의 거동이 가능할 때였다.
"표복암 나와!"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필 아버지가 없을 때 들이닥친 저승사자의 목소리에 표정애는 울음부터 터뜨렸다. 그러니 표복암이 손녀를 안심시켜야 했다. "아가야. 울지 마라. 이 할애비가 잠깐 갔다 오마."
표복암을 포함한 와우리 주민 100여 명이 사장으로 집결됐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곳에서는 몽둥이찜질이 없었다. 수군거리는 이들을 향해 수비대 책임자가 "저리 가"라며 목청을 높였다. 사장에서 약 800미터 떨어진 모래산으로 이동했을 때 그곳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4개 파여 있었다.
표복암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하는지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수비대는 다시 몽둥이찜질을 시작하더니 모래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들을 모래 구덩이에 집어넣었다. 그 위에 모래가 뿌려졌다.
표복암과 그의 셋째 며느리 안금임과 손주(달원, 문원, 명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표복암 가족 7명을 포함해 와우리 주민 100여 명이 모래 구덩이에 생매장됐다.
끝내 주검으로 변하다
"우리 성학이는 죽이지 마쇼."
"그러면 우리 일에 협조해야 하네."
와우리 양복출이가 사정하고 자은면 인민위원장 박아무개가 답했다. 자은면에서 수재로 소문난 양성학이 완도수산중학교를 나와 목포의 해태조합을 다녔다.
그는 일제강점기 말에 김양식을 하느라 여러 섬을 다니다 배에 화재가 나는 사고로 화상을 입었다. 그렇게 해서 자은면으로 돌아온 후에는 의용소방대를 설립해 활동했다. 6.25가 나자 완장 찬 이들은 양성학을 반동이라는 이유로 잡아들였다. 당시 의용소방대는 경찰의 보조 인력으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의 형 양복출(1921년생)이 발 벗고 나섰다. 인민위원장 박아무개를 만나 사정한 것이다. 박아무개는 양복출이 같은 마을 출신이기도 하지만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자은국민학교(초등학교의 전신) 선생을 했고, 해방 후에는 3.1절이나 8.15기념 시위 때마다 자은면을 대표해 연설하는 등 자은면의 리더 격이었다. 도초국민학교에 근무하다가 6.25를 맞은 그는 자은면 백산리 와우마을로 왔는데 동생이 구금된 것이다.
그런 이력이 있다 보니 인민위원장 입장에서 양복출이 자신들의 동지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젊은 리더로서 자신들의 활동에 협조케 하면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결국 양복출은 동생을 살리기 위해 인민위원회 일에 협조했다. 자은면 각 마을을 다니며 '인민공화국' 정책과 활동을 홍보했다. 그렇지만 그가 우익인사나 그 가족들을 해꼬지한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군경이 수복하면서 그는 부역자라는 올가미를 쓰게 됐다. 이번에는 그의 동생 양성학이 형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경찰에 최대한 협조하면서 형의 구명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하지만 동생의 노력은 빛을 발하지 못했고, 양복출은 끝내 남진창고 앞바다에서 주검으로 변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