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육영수 여사
국기기록원
가장 수고하는 사람을 만난 육영수 여사
1970년 4월 하순, 그 무렵 나는 서부전선 최북단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파주 심학산 일대 경계 임무를 띤 보병 26사단 73연대 3중대 부중대장 보직을 맡고 있었다. 어느 날, 뜻밖에도 현직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우리 중대 병사들을 위문코자 방문한다는 전달을 받았다.
그리하여 나는 영부인을 영접하고자 부대 환경과 병사들의 취사 및 위생 상태를 개선하는 총책을 맡았다. 나는 전 중대원 이발, 손발톱 깎기는 물론 심지어 영부인이 볼 리도 없는 팬티까지 사단 보급창에서 가져다가 새 것으로 갈아 입혔다.
그밖에 사단 식당의 식탁까지 우리 부대로 옮겨 놓기도 했다. 마침내 육영수 여사가 오는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별 판을 단 지프차들이 우리 중대로 우르르 몰려왔다.
영부인 도착 예정시간이 되자, 중대 위병소 앞에서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이 죽 도열 대기했다. 그런데, 육영수 여사가 탄 검은 승용차는 한강 둑길(현, 자유로)로 뿌연 먼저를 일으키며 오더니 곧장 부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부대 어귀 초소에 멈췄다.
그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영부인은 승용차에서 내린 뒤 초병과 악수를 나누고 그에게 수고한다는 인사말과 함께 기념선물로 사탕봉지를 전했다.
육 여사는 부대로 들어와서 중대장에게 연병장에 도열한 병사들을 모두 내무반에 들어가 쉬게 부탁했다. 그런 다음, 각 내무반과 취사장을 들러 병사들에게 잠자리는 편한가, 급식에는 부족함이 없는가 등을 챙겼다.
그 무렵 중대장은 육 여사 방문을 앞두고 행정실에 상황판을 새로 만든 뒤 여러 날 브리핑 연습을 했다. 하지만 육영수 여사는 행정실에 끝내 들르지도 않고 각 병사들의 내무반을 돌며 당신이 가져온 통닭과 사탕 봉지, 배구 공과 축구 공을 전한 뒤 곧장 바람처럼 훌쩍 떠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세 번 국민의 직접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한 바 있었다. 그때마다 부인의 덕을 단단히 봤다고 여겨진다. 아직도 우리 국민들은 잘난 체 하거나 남편에 앞서 설치는 영부인보다 뒤에서 몰래 봉사하는 영부인, 아무 데서나 불쑥 나서지 않는 겸손한 영부인에게 더 호감을 갖는다는 얘기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