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에게도 악을 갚지 말라"

[박도의 치악산 일기] 제 185회 -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5주기에 부치는 글

등록 2024.06.07 09:21수정 2024.06.07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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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생전 모습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생전 모습김대중 이희호 기념사업회

며칠 전 고향의 한 후배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나 차담을 나눈 뒤 헤어졌지만, 열차를 예매한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았다. 마침 거기서 가까운 의원회관에 있는 한 제자(김홍걸 의원)에게 그런 사정을 얘기하자, 그렇지 않아도 뵙고 싶었다는 말을 하면서 환대하기에 곧 그를 찾아갔다.

우리 속담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더니, 그날 그는 21대 의원 마지막 달로 한참 이삿짐을 꾸리다가 영접했다. 어쨌든 그는 여의도 정치권에서 밀려난 듯하여, 그 장면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편치 않았다.

"자네 아버지처럼 어려운 때일수록 부디 열심히 공부하시게. 실력을 쌓아두시면 반드시 재기할 날이 올 것이네."
"네, 선생님! 말씀 감사합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는 그 말과 함께 돌아오는 6월 10일은 어머니 기일이라는 걸 상기시키며, 그날 뵙자는 초대의 말도 전했다. 엊그제 한 비서관으로부터 이희호 여사 서거 5주기 추도식 초청장을 받았다.

마침 요즘 전 대통령 부인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들이 많이 회자되고 있기에 강원도 산골의 한 서생은 이 기회에 한 마디 남긴다.

사실 나는 평생 정치권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오래 산 탓인지, 역대 대통령 몇 분과는 직접 만나 악수도, 대화도 나눈 바 있었다. 그러다 보니 몇 부인들과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저런 얘기를 덧붙여 아예 <대한민국 대통령 - 그 빛과 그림자> 라는 책도 한 출판사(심인)에서 펴낸 바도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직접 만나 바 있는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와 김대중 대통령 부인 얘기 일부를 전하면서 국민들이 바라는 대한민국 대통령 부인의 바람직한 모습을 내 나름 피력해 본다.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육영수 여사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육영수 여사 국기기록원
 
가장 수고하는 사람을 만난 육영수 여사

1970년 4월 하순, 그 무렵 나는 서부전선 최북단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파주 심학산 일대 경계 임무를 띤 보병 26사단 73연대 3중대 부중대장 보직을 맡고 있었다. 어느 날, 뜻밖에도 현직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우리 중대 병사들을 위문코자 방문한다는 전달을 받았다.


그리하여 나는 영부인을 영접하고자 부대 환경과 병사들의 취사 및 위생 상태를 개선하는 총책을 맡았다. 나는 전 중대원 이발, 손발톱 깎기는 물론 심지어 영부인이 볼 리도 없는 팬티까지 사단 보급창에서 가져다가 새 것으로 갈아 입혔다.

그밖에 사단 식당의 식탁까지 우리 부대로 옮겨 놓기도 했다. 마침내 육영수 여사가 오는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별 판을 단 지프차들이 우리 중대로 우르르 몰려왔다.


영부인 도착 예정시간이 되자, 중대 위병소 앞에서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이 죽 도열 대기했다. 그런데, 육영수 여사가 탄 검은 승용차는 한강 둑길(현, 자유로)로 뿌연 먼저를 일으키며 오더니 곧장 부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부대 어귀 초소에 멈췄다.

그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영부인은 승용차에서 내린 뒤 초병과 악수를 나누고 그에게 수고한다는 인사말과 함께 기념선물로 사탕봉지를 전했다.  

육 여사는 부대로 들어와서 중대장에게 연병장에 도열한 병사들을 모두 내무반에 들어가 쉬게 부탁했다. 그런 다음, 각 내무반과 취사장을 들러 병사들에게 잠자리는 편한가, 급식에는 부족함이 없는가 등을 챙겼다.

그 무렵 중대장은 육 여사 방문을 앞두고 행정실에 상황판을 새로 만든 뒤 여러 날 브리핑 연습을 했다. 하지만 육영수 여사는 행정실에 끝내 들르지도 않고 각 병사들의 내무반을 돌며 당신이 가져온 통닭과 사탕 봉지, 배구 공과 축구 공을 전한 뒤 곧장 바람처럼 훌쩍 떠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세 번 국민의 직접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한 바 있었다. 그때마다 부인의 덕을 단단히 봤다고 여겨진다. 아직도 우리 국민들은 잘난 체 하거나 남편에 앞서 설치는 영부인보다 뒤에서 몰래 봉사하는 영부인, 아무 데서나 불쑥 나서지 않는 겸손한 영부인에게 더 호감을 갖는다는 얘기를 전한다.
  
 만년의 김대중 이희호 부부
만년의 김대중 이희호 부부김대중이희호 기념사업회
 
악은 악으로써 이길 수 없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와 생전에 세 번 만났다. 첫 번째는 1980년 늦은 여름(9월 중순 무렵), 당시 남편 김대중은 군사 법정에서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직후였다. 이 여사는 교도소 밖의 가족들을 보호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시절 교육학과 클래스 매트였던 김연옥 당시 이화여대 사대 교수가 마침 당신의 아들(김홍걸)이 재학 중인 학교장이라 부탁 겸 하소연을 하러 오는 차에 교장실 옆 교실에서 수업을 하던 나와 마주쳐서 알게 되었다.

그 두 번 째는 많은 세월이 흐른 뒤, 1988년 김대중 평민당 총재로 일일교사를 하시고자 학교에 오셨을 때 만났다. 그 세 번째는 당신의 자서전 <동행> 출판기념식 때 초대를 받아 만났다.

그분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은 내조를 하여 대통령이 되게 한 일등 공로자였다. 또 대통령이 된 남편에게 정치보복을 하지 않게 한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런 숨은 공로를 후일 알게 된 일반 백성들로부터 사후 칭송을 받고 있다는 것이 서생의 판단이다.

이 여사는 남편이 교도소에 있을 때 거의 날마다 편지로 용기를 잃지 않게 하고, 후일 집권 후 정치 보복을 하지 않게 하는 간절한 호소를 구구절절 기도문으로 전했다.

이희호 여사가 옥중 남편에게 보낸 숱한 편지글 가운데 1977년 9월 25일자 진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남편에게 보낸 편지 일구로 나의 추도사 마무리로 갈음한다.
 
존경하는 당신에게.
하느님과의 대화, 가장 천한 곳에서 그리고 외로운 곳에 처함으로 겸손의 미덕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 겸손뿐 아니라 고통을 체험했기 때문에 남의 고통을 내 것으로 느낄 수 있는 것도 참 귀한 것이 될 거예요.

보복을 부인하신 예수, 또 바울 사도도 "아무에게도 악을 갚지 말라"(로마 12:17)고 하셨어요. 이 뺨을 치는 자에게 다른 뺨을 돌려대는 것은 대단한 저항으로 박해자의 양심을 부끄럽게 하는 것인 줄 생각합니다. 오직 악은 악으로써 이길 수 없고 선으로만 이긴다는 것을 우리는 다 같이 알아야 할 것으로 믿어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르거든 마실 것을 주라"(로마 12: 20)고 가르친 이 같은 사랑을 생각하고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1977. 9. 25.)(로마 12:17)고 하셨어요. 이 뺨을 치는 자에게 다른 뺨을 돌려대는 것은 대단한 저항으로 박해자의 양심을 부끄럽게 하는 것인 줄 생각합니다.

오직 악은 악으로써 이길 수 없고 선으로만 이긴다는 것을 우리는 다 같이 알아야 할 것으로 믿어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르거든 마실 것을 주라"(로마 12: 20)고 가르친 이 같은 사랑을 생각하고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1977. 9. 25.)
덧붙이는 글 유튜브에서 "당신이 없었으면 나도 없었다"를 보시면 이 여사 얘기를 더 들을 수 있습니다.
#이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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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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