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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후손의 절개 "나라 망하는 거 어떻게 앉아 보나"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을미의병의 효시 문석봉 선생

등록 2024.07.02 10:37수정 2024.07.0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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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미의병의 효시 문석봉 선생 존영
을미의병의 효시 문석봉 선생 존영공훈전사사료관

1895년 11월 28일 대구부 감옥에서 관찰사 이중하는 한 사람을 심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심문받는 사람은 전혀 죄인 같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관찰사를 통렬하게 꾸짖고 날카롭게 몰아세웠습니다. 이어 그는 밀고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음을 한탄했고 끝없이 목 놓아 통곡했는데요. 분을 못 이겨 이를 어찌나 세게 악물었던지 그만 어금니 두 개가 부러졌습니다. 선혈은 손바닥 위에 뿌려졌고, 남은 피가 입 속에 가득 찼습니다. 계단에는 마치 붉은 비가 내린 듯 피가 흥건했습니다. 심문받던 사람은 조선 말 최초 대규모 항일 의병이었던 을미의병,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봉기한 문석봉 선생이었습니다.

선생은 1851년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문하규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한반도에 목화를 도입해 시험 재배와 보급까지 성공한 문익점의 후손이었는데요. 고려 신하였던 문익점 이후, 조선조에 들어서는 집안이 낙향하여 관직에 나가는 일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다만 문석봉 9대조 문영남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왜적을 무찔렀고요. 선략장군 훈련봉사(宣略將軍訓練奉事)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문석봉 대에 이르러 집안은 거의 평민 신분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린 문석봉은 무예가 출중했는데요. 12살에 이미 죽궁을 쏘았고 백발백중 실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육도삼략을 비롯한 병서를 공부했고, 1870년부터 3년간 고견암(古見庵) 암자에 살면서 무술을 익히기도 했습니다. 암자를 나와서는 다시 2년간 두문불출하며 주역을 공부했고요. 1875년에는 중국 금릉(金陵, 난징)으로 건너가 왕희주에게 한의학을 배우는 등 매우 다재다능했습니다.

문석봉은 어릴 적 스승을 통해 학문을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통해 몇몇 유교 경전을 배웠는데요. 스승이 따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인으로서도 출중한 소양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41살이 되던 1891년에는 고향에 영파재(映波齋)를 짓고 빈민층 아이들 50명을 모아 한학을 가르쳤습니다. 어버이에 대한 효도, 형제끼리 우애, 임금에 대한 충성, 벗 사이 믿음을 가르치며 인륜을 중요시했습니다.

나라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준 문석봉

선생은 성품이 의롭고 어질었는데요. 1882년 32살 나이로 처음 관직에 나갔을 때 일입니다. 그는 전라도 지역 곡식을 조운선으로 한양까지 운반하는 조운리(漕運吏)를 맡았는데요.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나르던 중 목포와 무안을 지날 때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당시 전라도 지역 기근이 너무나도 심해 백성이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선생은 결단을 내리고 운반하던 곡식을 백성에게 다 풀어 나눠줘 버립니다. 당연히 조선 정부는 체포령을 내렸는데요. 선생은 의연하게 답합니다.

"나라를 속인 것은 죄이나 이 백성들은 어찌 나라 사람이 아니겠는가. 쌀을 중히 여겨 백성을 버리는 일은 차마 못하겠다."


문석봉은 집안일을 친구 김수영에게 맡기고 방장산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는데요. 후에 김수영과 어병선 현감이 상소를 올리고 백성을 구제한 실상을 알렸습니다. 덕분에 죄를 용서받고 산에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1893년 5월 무과 시험에 합격해 다시 관직을 얻었는데요. 경복궁 수비를 담당한 경복궁오위장을 맡았다가 12월에는 현재 대전광역시 유성구 진잠동인 진잠현 현감에 제수되었습니다. 1894년 11월에는 호남과 호서 지역에서 병사를 모으고 지휘하는 양호소모사(兩湖召募使)직을 맡습니다. 주된 역할은 동학농민군을 진압, 체포하고 처형하는 일이었는데요.


충남 진잠현의 동학 접주 박만종을 지금의 대전광역시 서구 가수원동 인근에서 체포한 일을 시작으로 많은 전공을 세웁니다. 연산, 은진, 진산, 여산, 청산, 보은 등지에 여러 차례 출정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했고요. 특히 1895년 1월 25일부터 28일까지 연산지역 전투에서 1천여 명 동학군을 공격해서 40여 명을 체포했습니다. 투항자는 400여 명에 달했고, 동학군 간부 5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연산을 비롯한 인근 6개 지역 주민이 '양호소모사문공석봉명찰선정비(兩湖召募使文公錫鳳明察善政碑)'를 진잠에 세웠는데요. 선정비는 진잠동 도로 개발 과정에서 사라져 지금은 찾을 수 없습니다.

문석봉 선생은 나라의 명으로 동학군을 진압하기는 했으나, 온건하고 관대한 태도를 보였는데요. 앞서 체포한 동학 접주 박만종에 대한 처분을 두고 상관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체포된 박만종은 결국 참수되는데, 선생은 눈물을 뿌리며 애석해합니다. 또 동학군에 대한 진압과 살상을 매우 불쾌해했는데요. 생업으로 돌아가야 할 백성을 살상하는 행위가 전혀 의롭지 않다고 비판했습니다. 사람들은 문석봉 부대를 '인의(仁義)의 부대'라고 칭송했습니다.

"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면 그만두겠으나..."
  
 문석봉이 작성한 '의산유고'의 유성의병 봉기 관련 기록
문석봉이 작성한 '의산유고'의 유성의병 봉기 관련 기록독립기념관
 
선생이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집단은 사실 따로 있었는데요. 동학농민군이 아니라 바로 일본군이었습니다. 선생이 중앙에서 벼슬을 할 때 일본이 강압해서 조선이 개화되는 과정을 목격했고요. 특히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동안 일본군이 보여준 위압적이고 무자비한 모습을 경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의 마음속에 점차 일본에 대한 분노가 일었고, 마침내 큰 결심을 합니다.

앞서 공을 세운 문석봉 선생은 1895년 2월부터 공주부 신영 영장으로 근무 중이었는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어 구금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김재수라는 사람이 선생을 고발했는데요. 죄목은 토왜죄(討倭罪)였습니다. 선생이 관병 400명을 신식으로 훈련하고 소가죽으로 갑옷을 제작했는데, 일본군을 몰아낼 목적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선생은 서울로 압송되어 경무사 이윤용에게 심문을 받았는데요. 그때 진술이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윤용은 "너는 능히 일본을 대적할 수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선생은 이렇게 답합니다.

"우리 태조가 세운 500년 조종 사직을 어찌 가벼이 두 손으로 오랑캐 적들에게 바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면 그만두겠으나, 할 수 있는 힘이 있으니 할 것입니다. 신하가 된 자가 어찌 한번 죽는 것을 아까워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앉아서 볼 수 있겠습니까? 통곡 통곡합니다."

이렇게 첫 번째 의병 시도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약 4개월 감옥살이 후 6월 21일에 사면받고 풀려났는데요. 이후 그는 잠깐 종적을 감추고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살았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큰 물줄기는 선생을 초야에 묻히게 두지 않았습니다. 음력 8월 20일 새벽. 일본공사 미우라는 일본군 수비대를 동원하고, 일본공사관원, 영사경찰, 낭인배를 행동대로 세워 조선 왕후를 무참히 살해 후 시신을 불태웠습니다. 이른바 을미사변입니다.

을미사변 이후 문석봉은 다시 일어납니다. 이번에는 보다 철저하게 의병 봉기를 준비했는데요. 여러 인사를 만나 봉기에 동조할 세력부터 확보합니다. 서울로 가서는 훗날 자결로 일제에 저항한 민영환을 만납니다. 민영환은 문석봉의 뜻에 적극 찬동하며 환도 한 자루를 풀어주며 격려하고 시 한 수를 지어 뜻을 밝혔는데요.

"日月明明 天地定位 (일월명명 천지정위)
해와 달이 밝고 밝으니 천지가 그 자리를 정하고,
忠義炳炳 君臣義分 (충의병병 군신의분)
충성과 의리가 빛나니 군신이 그 의무를 다하네.
聞君此語 喬木所恥 (문군차어 교목소치)
그대의 이 말을 들으니 교목이 부끄러움을 느끼네."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자는 마음으로 뭉친 의병들
  
 2004년 유성장터 장터공원에 세워진 유성의병사적비. 유성시장 재개발로 인해 곧 이전될 예정이다.
2004년 유성장터 장터공원에 세워진 유성의병사적비. 유성시장 재개발로 인해 곧 이전될 예정이다.독립기념관
 
문석봉 선생은 을미사변으로부터 약 한 달 후인 9월 18일 유성 장터에서 거병합니다. 이때 선생은 죽음까지 불사할 결심을 합니다. 아들은 친구에게 맡기고, 가족과 영원히 헤어질 각오를 다지는데요. "사람이 한 번 죽을 것을 판단하기는 진실로 어려우니, 밤낮으로 생각하고 헤아려 마음속에 '死'자를 결심하고, 의심이 없은 연후에 처자와 영결하고 기신하였다." 이때 선생이 전국에 보낸 통문이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성모(聖母, 명성황후)께서 해를 입으신 것은 실로 천고에 없는 대변입니다. 일찍이 복수를 하지 않고 참아 이 적들과 어찌 한 하늘에서 더불어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감히 욕되게 사는 것보다 영광되게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고자 합니다. 아, 우리나라 누구인들 신하가 아니며 누가 복수를 원하지 않으리오. 같이 일어나 대의로서 흉당을 멸망시키고 社稷(사직)을 건지는 것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문석봉은 부대를 꾸린 후 10월 20일 회덕현을 급습해 무기를 탈취했습니다. 이어 무장한 300여 명 의병이 유성 장대리에 진군했는데요. 문석봉 부대에는 양호소모사 시절부터 함께한 오형덕, 회덕현 유학자인 송도순 그리고 회덕 대전 진잠 유성 지역 선비와 백성이 함께 했습니다.

이들은 '국수보복(國讐報復)' 기치를 들었습니다. 일본군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자는 마음으로 뭉쳤는데요. 을미사변을 국치로 보고 신하로서 원수를 갚는 일이 당연한 의리로 여겼습니다. 문석봉이 일으킨 유성 의병이 바로 기록으로 남은 을미의병 최초 봉기였습니다.

10월 28일 문석봉 부대는 공주부 관아를 점령해 지리적 이점을 취하려 합니다. 현재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를 거쳐 공주로 진격하는데요. 문석봉 부대와 관군은 지금의 공주시 소학동 인근에서 전투를 벌입니다. 하지만 동태가 사전에 낱낱이 보고됐고, 병사들이 싸움에 익숙지 못했던 데다, 관군이 미리 매복했던 탓에 문석봉 부대는 대패하고 와해되어버리고 맙니다. 결국 문석봉 선생의 두 번째 봉기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문석봉 선생은 오형덕과 함께 말을 타고 남쪽으로 달려 경상도 고령현과 초계군 일대에서 다시금 봉기를 준비했습니다. 고령현감과 초계군수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요. 초계군수 신태철은 "관에서 당신을 잡는 것이 매우 급하다고 하여 현상금으로 만금을 걸고 여러 군의 사람들에게 상을 주겠다고 한다. 잠시 숨어서 후일을 기도하십시오"라며 안위를 걱정해주기도 했지만, 고령현감은 이들을 밀고해 버립니다. 결국 11월 24일 문석봉 일행은 체포되어 대구부에 구금되었습니다. 이때 심문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본인은 충의의 마음을 가지고 처자와 영원히 결별하여 대의를 일으키기를 맹세하였습니다. 성모의 옥체에 당일 손을 댄 역적들을 조사하여 임금이 있는 궁궐 아래에서 죄인을 죽여 그 시체를 여러 사람에게 보이고, 그 고기를 포로 뜨고, 그의 간을 회를 쳐서 천신에게 설욕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만 가운데 하나의 분을 풀려는 것입니다. 나라의 운명이며, 나의 운명이 마침내 이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한번 죽어 나라에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빨리 죽여주시고 수고롭게 많이 묻지 마십시오."

고종이 문석봉에게 '충의' 두 글자를 써준 까닭

비록 옥에 갇힌 몸이었으나 문석봉 선생은 포기할 줄 몰랐습니다. 1896년 봄 오형덕과 함께 캄캄한 한밤중에 옥문을 부수고 탈출에 성공합니다. 고향 집으로 찾아갔으나 이미 일본군이 와서 집을 불태워 버린 후였습니다. 그해 4월 선생은 몰래 서울로 들어갑니다.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였지만, 흥선대원군은 그저 한탄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때 뜻밖의 부름이 찾아옵니다.

고종 임금이 친히 그를 찾습니다. 고종은 선생에게 '충의(忠義)' 2글자를 써서 내렸습니다. 또한 칙서를 써주며 명령을 내렸는데요. "만일 네가 아니라면 어찌 나의 근심을 알겠는가? 지금부터 백세동안 응어리진 마음을 잊지 말라" 임금이 내린 조칙에는 서둘러 원주로 가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되어 전국에 통문을 돌린 후 장차 일본을 이기기 위한 군대를 일으키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문석봉 선생은 울며 임금이 내린 명령을 받듭니다. "임금의 은혜가 하늘과 땅과 같이 널리 미치는데 용기가 없고 꾀도 없어서 국가의 원수를 갚지 못하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후 문석봉 선생은 실제 원주에서 각도 의병장에게 통문을 돌려 다시 한번 거병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고생한 탓에 병에 걸려 쓰러집니다. 1896년 11월 19일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습니다. "임금의 은혜를 갚지 못하고 하늘의 운수가 이미 다하였다. 내 어찌 눈을 감으랴?" 그는 죽어서도 눈을 부릅뜨고 감지 못했습니다. 돌아가신 지 5일이나 지나서 손에 환도를 쥐여 드리자 그제야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애국지사 문석봉의 묘 (독립유공자 2묘역 168호)
애국지사 문석봉의 묘 (독립유공자 2묘역 168호)임재근
 
그는 백성에게 인자한 관리였으며, 임금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충신이었고, 절대로 포기할 줄 몰랐던 의병장이었습니다. 을미의병 이후 을사의병, 정미의병 등으로 의병 전쟁이 전개되는데요. 다른 이들이 주저할 때, 맨 먼저 분개하고 행동에 나선 실천가였습니다. 대한민국은 1993년 선생 영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합니다. 의병 전쟁 맨 첫머리에 올라 있는 문석봉 선생은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168호에 고이 잠들어 있습니다.

[참고자료]
『의산유고(義山遺稿)』
「조선말 문석봉의 유성의병」(김상기, 『역사학보』 134·135 합집, 1992)
공훈전사사료관 (https://e-gonghun.mpva.go.kr)
#을미의병 #유성의병 #문석봉 #을미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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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시민활동가입니다. 우리 지역 현장 곳곳을 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마이크가 필요한 분에게 마이크 드리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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