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창헌 지사
공훈전사사료관
나창헌 지사는 1896년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 갈현동에서 5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는데요. 일신학교, 영변보통학교, 평양고등학교, 한성고등학교를 거쳤습니다. 1913년에는 교원을 속성으로 양성하기 위한 기관이었던 경성교원양성소를 수료하고, 모교인 일신학교로 내려가 1년 정도 교편을 잡았습니다. 이후 일본에서 2년간 유학 생활을 하는데요. 지사는 정신의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1917년에는 귀국해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18년 12월 20일부터 1919년 2월 초까지 지사는 일본에 머물며 정신연구회에서 활동했는데요. 마침 이 무렵 일본에 유학중이던 조선인 유학생들은 독립의지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유학생들은 1918년 12월 29일과 30일 독립문제를 두고 격렬한 토론을 펼친 뒤 실천에까지 나서기로 결의하는데요. 이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운동으로 이어집니다.
나창헌 지사는 유학생 모임에 참석해 2.8독립선언운동을 함께 추진했는데요. 2월 초 귀국 후에도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에게 일본 유학생들의 움직임을 전하며, 3.1운동 학생 대표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의기투합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은 치밀하게 3.1운동을 준비했습니다. 학생들을 동원할 방법을 토론했고, 독립선언서 배포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기성 종교계 세력과 연계해서 대규모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 외침이 터져 나왔고, 나창헌 지사는 2차 시위를 준비하던 중 3월 2일 일제 경찰에 체포됩니다.
지사는 체포돼 있던 중 병보석을 신청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는데요. 7월경 세브란스 병원 창문을 넘어 탈출에 성공합니다. 이후 독립운동 지하조직인 '대동단'과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입합니다.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서 그는 특파원 자격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특수 임무를 수행했고요. 1919년 8월 29일 만세 시위 때는 인쇄물 배포 책임을 맡아 각 독립운동단체와 학교에 비밀리에 문서를 전달했습니다.
대동단에서도 지사는 비밀 임무를 맡아 수행하는데요. 의친왕 망명 작전에 투입됩니다. 국내에서 의친왕을 몰래 빼내 임시정부로 탈출하는 작전이었는데요. 나창헌 지사가 함께 동행해 의친왕과 단동역까지 오는 데 성공했으나, 탈출을 눈치챈 일제의 방해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후 나창헌 지사는 체포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합니다.
1920년 1월 나창헌 지사는 중국 상해에 도착합니다. 기대를 안고 임시정부를 찾았지만 지사는 곧 깊은 실망에 빠지는데요. 임시정부는 사분오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사는 임시정부에 당장 합류하기 보다는 독자 노선을 걷기로 정하고 '철혈단'을 조직합니다. 비폭력성에 깊은 한계를 체감한 지사는 의열 투쟁으로 나라를 되찾겠다며 다짐하는데요. 나창헌 지사는 이후 암살과 파괴를 통한 무력 투쟁을 전개합니다.
"우리들의 독립은 총과 검과 혈이 아니면 성공할 수 없다. 고로 우리들은 금후 한 사람이 될 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철과 혈로써 저 간악하고도 악독한 왜구를 배제할 것이다."
임시정부가 분열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대통령 이승만에게 있었는데요. 외교론에 편향되어 임시정부 운영에 소홀한 책임이 컸습니다. 동포에게 성금을 거둬들인 다음 그 통제권을 두고도 마찰이 컸습니다.
나창헌 지사는 1925년 임시의정원에 참여했고, 동료 의원들과 함께 대통령 탄핵안을 제출했습니다. 또 지사는 곽헌, 채원개, 김현구, 최석순 등 5명으로 구성된 탄핵심판위원이었으며 이승만탄핵심판위원장으로 선임됩니다. 임시의정원은 심판위원회 결정에 따라 3월 23일 이승만 탄핵을 선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