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더워 머리를 짧게 잘랐다(자료사진).
픽사베이
날이 더워 나는 목덜미와 귀가 시원하게 드러난 쇼트커트(일명 숏컷)로 자르고 출근했다. 그런데 이날, 날 보자마자 한 마트 직원이 왜 이렇게 바보처럼 잘랐느냐고 물었다. 또 어떤 분은 내게 너무 짧게 잘랐다고 이전이 낫다고 하셨다.
나는 개의치 않으려 했다. 머리를 짧게 자르면 가끔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알았다. 그래도 나만 편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를 아는 사람을 넘어, 처음 보는 손님들까지 나에게 한 마디씩 건네기 시작했다. 얼핏 보고는 남자인 줄 오해했다는 얘기. 그러다 내 목소리를 듣고 여자임을 알아보는 식이었다.
"여자였어? 난 또 남자인 줄 알았네."
차라리 "여자여, 남자여?" 물어보면 나았다. 어떤 분은 무안할 정도로 내 얼굴을 대놓고 뜯어보았다. 별 신기한 광경을 다 본다는 식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기분 따위는 가뿐히 무시했다.
그러나 대부분 얼굴이 주름살이 잡힌 분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하는 말이었기에 '저 나이대면 성별에 고정관념이 강할 수밖에 없지' 여기며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웃음으로 넘겼다.
어떤 분은 급하게 나를 부른다는 게 '총각'이라고 했다. "총각, 저기 무시(무) 좀 갖다 줘"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들은 다른 동료 계산원이 크게 웃었다.
"총각이 아니라 아가씨에요! 하하하!"
무안했다. 점점 마음이 지쳐가던 중 이번엔 한 아주머니가 갑자기 화살을 날렸다.
"머리를 왜 저렇게 잘랐대? 얼굴도 꼭 남자 같아, 호호."
명백하게 내 외모에 대한 평가였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 외모 평가가 얼마나 무례한 건지 잘 모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단지 머리를 잘랐다고 하루 만에 이렇게 많은 공격이 날아올 줄은 몰랐다.
그런데 의외의 사람이 전혀 기대하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그 주인공은 내가 조금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상냥한 여자 손님이었다. 그 분은 늘 우유를 계산대에 올려놓으며 "저는 이렇게 골랐습니다, 헤헤" 하고 어수룩하게 웃었다.
40대 초중반 즈음 됐을까, 나보다 나이는 더 많아 보이는데도 내게서 잔돈을 받을 땐 꼭 나를 '언니'라고 했다. "고맙습니다, 언니.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하고 말하곤 했다. 어느 날엔가는 '고맙다'는 말 대신 끝을 부드럽게 늘인 억양으로 계산대에서 "사랑합니다아~"라며 인사한 뒤 떠난 적도 있다.
옷차림만 봐도 늘 헐렁하게 늘어진 티셔츠와 면바지, 뜨개질 모자에서 변하질 않았다. 더구나 그분이 가까이 오면 체취가 풍겼기 때문에, 솔직히 그리 반가운 손님은 아니었다.
이날도 여느 때처럼 이 손님이 우유를 계산대에 올리고 있는데 바로 앞 손님이 장바구니를 챙기고 나를 보며 "왜 저렇게 머리를 짧게 잘랐대. 남자인가 헷갈리게"라며 혀를 차셨다. 순간 울컥했다. 그런데 내가 속으로 어딘가 모자란 분이라고 생각한 그 손님이, 뒤에 서 있다가 나섰다. 그는 웃으며 되받아쳤다.
"여름인데 짧으면 시원해 보이고 좋지요, 헤헤."
그 말 덕에 다들 맞장구치기 시작했다. 자칫 기분 나빴을 상황이 한 번에 정리되었고 모두 아무 말 없이 떠났다. 어리석은 내 안목으로 부정적으로 판단했던 그 손님은, 십수 년 전 나는 물론, 꽤 성장했다고 자부하는 지금의 나도 잘은 하지 못하는 일을 쉽사리 혹은 세련되게 해내는 참 귀한 손님이었던 거다.
배경처럼 서 있는 사람들이지만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 속 계산원은 어디나 있다. 늘 배경처럼 서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럴까. 다들 그를 쉽게 본다. 어떤 면에선 이해가 간다. 계산원은 손님의 편의를 봐주는 게 우선인 사람이니까.
그러나 이런 친절이 당연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계산원의 친절은 어디까지나 손님을 위한 것이지, 상대를 만만하게 대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런 점은 간과하고 계산원을 인격체로 존중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내가 서글서글한 눈매가 아니라 갈고리눈의 소유자였다면,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아니라 억센 목소리였다면, 입가에 미소가 아니라 단호함을 물고 있었어도 과연 똑같은 공격을 받았을까. 아마 아니지 않을까.
상사 대하듯 어려워해 달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동등한 사람으로만 대해주길 바랄 뿐이다. 아무리 각박하고 몰인정한 사회라 해도 그 정도가 무리한 욕심은 아니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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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해지고 싶으면서도 다른 사람과 달라지는 것에 겁을 먹는 이중 심리 때문에 매일 시름 겨운 거사(居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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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컷했다가 봉변당할 때 뜻밖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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