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제 마을 팽나무 앞에서 여정진씨가 설명을 하고 있다
유기만
- 당시 바다는 어땠습니까?
"60~70년대에 조개도 많고 고기도 많았어요. 김제 심포, 부안 계화도 이런 곳에서도 노랑 조개를 잡으러 왔어요. 어마어마했죠. 한 300척이 넘은 배들이 조개를 잡았는데 중간에 큰 배가 있어서 조개 잡는 배에 조개가 가득 차면 큰 배에 내리고 또 잡고 했죠.
그리고 장어가 알 낳으러 오잖아요. 장어가 많이 잡혔죠. 황복, 광어도 크고 좋았어요. 광어가 잡히잖아요 그러면 20kg 정도 되는 광어가 잡히고 그랬죠."
함께 온 나두길(70세)씨가 말했다.
"군산 면 중에 옥서면이 제일 컸어요. 옥구에서 옥서로 면이 나뉘었죠. 인구가 많아지니까 60년대 말에 노랑 조개 터지고 70~80년대 전성기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죠."
- 그럼 언제부터 안 좋아졌어요?
"새만금 막고 나서부터죠. 돈(보상) 주고 하니까 이게 공돈인 줄 안 거야. 어업권이 없어지니 생계가 없어지는데 그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배를 갈라서 잡은 거지."
- 어업 안 하고 그럼 어떻게 지내셨어요?
"어머니가 재가하시고 저는 1966년에 원치 않았지만 마을을 떠났죠. 서울로 가서 일하다가 79년에 다시 전주로 왔어요. 동생은 여기서 고향 횟집을 하고 있죠."
- 미군기지 확장과 새만금 사업으로 마을이 없어졌는데 어떠세요?
"화산 공동 선산도 밀어버리고 저희 아버지는 납골당에 모셨는데 고향이 안타깝죠. 이제 팽나무가 천연기념물이 되면 땅이라도 사야죠."
- 새만금 사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실패작이라고 생각해요. 저번에 누워 있는데 부안에서 지진이 났잖아요. 부안에서 났으면 그놈의 (새만금) 둑이나 확 터져버렸으면 좋겠다 그랬어."
"해수 유통하면 저 배 갖고 고기 잡으면 되죠. 사람들이 처음에 공돈인 줄 알았는데 막상 나가니까 할 게 없어. 아파트 경비 하다가 일용직 하고, 도시 빈민이 되기도 하는 거야. 여기서는 베테랑 어부로 하루에 50만 원, 100만 원 벌던 어부들이. 여기 황금 어장을 잃어버리고 하제가 없어져도 유통만 되면 지금 원동에 여기 살던 사람들이 살아요. 그 사람들 하면 되지."
- 한 달에 한번 팽나무 문화제에 오시면 어떠셔요?
"여기가 바로 이 자리가 내 태 무덤이잖아요. 사람들이 이렇게 한 달에 한 번 팽나무에 와줘서 무지 감사하고 고맙죠. 원래 우리들이 해야 하는데 우리들은 수수방관하고. 신부님이랑, 형제, 자매님들 수녀님이랑 이렇게 오셔서 이 나무를 지키러 올 때 너무 고맙죠."
1956년 12월 2일 아버지 죽음에 대하여
인터뷰 마직막에 여정진씨께 물었다. "끝으로 하실 말씀 있으세요?"
여정진씨는 "기자면 미 국방부가 1956년 12월 2일 날 민간인을 향해서 사살한 것 좀 밝혀주세요. 미국이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든가 보상을 해줬다든라든가... 난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개가 하시면서 인생이 완전히 뭐 돼버린 거야. 그것 좀 알아봤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저하고 친동생 낳고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신 거예요. 이것이 트라우마가 되고 아비 없다고 무시당하고... 네 아버지 여기서 총 맞아 죽었냐 이렇게 놀리는 친구들 보면 확 돌아버리고, 그때부터 내가 좀 부글부글한 그런 게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여정진씨는 5살이고, 어머니는 23살, 아버지 31살 때였다고 했다. 어머니가 재가 하면서 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원치 않게 고향을 떠난 여정진씨의 인생에 아버지의 죽음은 큰 트라우마라고 했다.
여정진씨가 전해 들은 말로는 아버지가 총에 맞고 옆에 있는 삼촌에게 말했다고 한다.
"삼촌 나 총 맞았어."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고 한다. 당시 밤이어서 조용한데 총소리가 났으니 마을 사람 모두 놀랐다고 했다. 비행장에 갔는데 총알이 간과 폐를 뚫었다고 하는 말도 있더라고 했다.
여정진씨는 그날 밤이 아직 생생하다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동네 형이 괴롭혀서 아버지에게 일렀더니 아버지는 "잠깐만 기다리라"며 "아버지가 다녀와서 혼내 준다"고 하고 집을 나섰다고 했다. 그런데 잠자고 있는데 울음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사촌 누나가 오촌, 오촌 하면서 통곡을 하면서 울었다고 했다. 아버지를 들것에 실려 왔는데 그 기억이 트라우마에 남았다고 했다.
"지금도 죽어도 잊어 먹을 수가 없어요."
직업이 기자도 아니고 시민 기자 신분으로 인터뷰를 했을 뿐인데 아버지의 죽음을 밝혀 달라고 한 여정진씨의 마지막 말이 마음 속에 박혔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1956년 12월 2일 사건은 검색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1000년이 넘게 살아온 하제 여씨는 일본에게, 미군에게, 한국 정부에게 땅과 바다를 빼앗기고 말았다. 남은 건 그 세월을 지켜보고 살았을 팽나무 뿐이다.
언젠가 이곳에 군사 기지가 사라지고 옥녀봉에서 화산까지 다시 해당화가 심어질 날이 있을까? 하제 마을도 사라지고 수라 갯벌은 새만금 신공항 건설로 사라질 위기이다.
여정진씨는 이제라도 새만금 바다가 살아나면 마을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돌아올 거라며 희망을 놓지 않았다. 생명이 없는 곳에 사람도 살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와 작은 희망을 품고 우리는 하제 6박 7일 새만금 바다와 마을 기행을 팽나무에서 출발했다.
다음은 함께 새만금 마을과 바다 기행을 떠난 동료 유준의 글이다. 아래의 글로 새만금 바다와 마을 기행 연재를 마친다.
연재를 마치며. 빼앗긴 바다에도 봄이 찾아 올 수 있기를....
▲하제 팽나무 앞에서 새만금 바다와 마을 기행 출발 전 사진을 찍은 유준, 유기만
송지나
동료 유준의 글 |
위도에서 만난 조개는 내 주먹 크기만 했다. 뻘 속 깊이 몸을 감추고 있어야 할 조개가, 무더운 여름 땡볕 아래로 나와 입을 벌린 채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명이 넘쳐났던 건강한 뻘은 이제 생물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뻘로 변해버렸다. 이 조개의 모습은 마치 전라북도 바다의 현재를 한 장면으로 압축해 놓은 듯했다.
이곳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야기가 파도 실려 왔다. 지구의 온난화로 더워진 바다, 원자력 발전소의 온배수, 불법 어획의 그림자, 폭격장으로 변한 섬, 그리고 인구 감소와 새만금의 거대한 장벽까지.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듣지는 못했지만, 짧은 기행만으로도 이 땅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시절, 바다는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노력하는 자는 배를 곯는 일이 없었다. 밤하늘의 별을 따라 길을 잡고, 보이지 않는 바다 속 지형을 이해한 사람은 자신만의 비밀어장을 가질 수 있었다. 사람들의 인심은 후했고, 마을 공동체는 단단했다. 하지만 지금, 어촌을 돌며 이야기를 듣고 눈으로 확인한 것은 모든 것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한적한 민박집 앞에서 만난 낚시꾼 할아버지였다. 민박집 창고 앞에서 낚시 채비를 하며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은퇴 후 30년 동안 이 섬에서 살며 바다와 함께해 온 그의 손길은 바닷바람에 깎여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낮에는 낚시 채비를 준비하고, 밤이 되면 방파제에서 낚시를 하고 돌아 왔다. 둘째 날이 되어서야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낚시가 잘되던 시절, 이 섬에 정착해 민박집을 운영하며 여유로운 삶을 즐겼다고 했다. 그게 좋아 남매까지 내려와 같이 민박집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바다는 그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물고기는 사라지고, 바닷가에 나뒹구는 조개들조차 죽어가고 있었다. 그의 낚시는 이제 소일거리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민박집도 정리를 하고 육지로 가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 기행에서 마주한 사람들은 모두 '죽뻘'이라는 단어를 자주 입에 올렸다. 한때 생명으로 가득했던 뻘은 이제 죽음의 뻘이 되어버렸다. 새만금 사업으로 인해 강과 바다의 순환이 끊어지고 밀물과 썰물의 힘이 약해지면서 뻘은 그 생명력을 잃어갔다. 사람들은 이 죽뻘을 바라보며 바다의 끝을 직감하고 있었다. 죽뻘은 어디서나 나타났다.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에서도, 섬의 가장자리에서도, 새만금 내측의 뻘에서도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고창에서 군산에 이르는 칠산바다마저도 그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칠산바다는 한때 조기로 유명했다. 그 조기로 인해 활기찼던 파시도 이제는 그저 벽화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망둥어와 홍합은 사라졌고, 바지락 종패는 이제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생존율이 낮아 어민들의 시름은 깊어졌다. 백합의 주요 산지였던 하제의 수라 갯벌도 새만금의 장벽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를 위기에 처해 있었다.
기행 중 만난 어민들은 하나같이 전라북도의 바다에 미래가 없다고 말했다. 사람들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남아 있는 이들조차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수 없었다. 마을의 활기는 바다와 함께 메말라가고 있었고, 그들은 그저 무기력하게 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짧지만 강렬했던 이 기행을 통해 깨달은 것은, 자연의 풍요로움을 빼앗은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자연은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자연이 스스로를 회복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빼앗긴 바다에도 봄이 찾아올 수 있을까? 그 답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자연을 되살릴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우리는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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