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서울시 보도자료 "필리핀 가사관리사 9.3.(화) 142가정 서비스 시작… 상시신청 가능"(2024. 9. 3.)
서울특별시
제도적 차별이 보장되는 근거 : 참정권
이들 정치인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 주장의 근저에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다. 즉, 정치인들이 노골적으로 외국인 노동자에게 불이익을 공여하자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은 외국인 노동자가 우리나라에서 정치적 의사표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는 제도적 장치는 사실상 당연하게 여겨진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외국인은 참정권이 보장되는 경우가 예외적이다. '왔다 가는 사람' 취급되는 것이 외국인에 대한 일반적인 시선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는 정부 정책과 법률의 도입·설정·운영 등 방향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
한편 단 1초라도 한국 땅을 밟은 외국인에게는 모든 한국 법이 적용된다. 속지주의 때문이다. 속지주의란 행위자의 국적을 불문하고 자국 영토 내에서 행해진 법률행위에 대해서는 자국의 법률을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외국인 노동자에게도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 등 노동관계법령이 전부 적용되고, 심지어 이른바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라 하여도 노동조합 설립의 주체가 될 수 있고, 임금체불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으며, 산재보험 보상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모두 속지주의 원칙이라는 한국 법의 대원칙 때문이다.
이렇게 외국인 노동자는 국가 정책과 관련한 민주적 의사결정에는 참여할 수 없지만, 국가의 모든 사법적 작용에는 소환될 수 있는 예외적인 사회적 지위를 가진다. 그렇기에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외국인 노동자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에게도 우리 법이 적용된다
우리 사회 구성원의 정의를 '우리 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경우, 이런 의미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도 우리 사회 구성원이라 할 것이다. 현대 법치 사회는 법의 적용 범위를 한 사회의 테두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외국인 노동자들은 우리나라 노동법을 통하여 다양한 권리를 보장받기도 한다. 필자는 최근에 남수단 출신 노동자 A씨와 부당해고 구제신청 사건을 진행하였는데, A에 대한 해고는 부당해고로 판정되었다. 한국의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어 그는 원직복직에 갈음한 금전보상을 받았다. A는 근로기준법을 통해 권리를 보장받았다. 즉, 근로기준법의 적용에 있어서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런데 사건 초기 A와 상담하면서 많은 생각을 들게 만든 말이 있었다. A는 "그래도 우리 사장님은 착해요. 저한테 욕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라고 말했다.
한편 그가 제공한 녹취파일에서 사장은 A씨에게 "야", "너", "여기서 일 못 해", "이제 나가"라고 반말로 말하지만, 한국인 직원에게는 "김 차장님", "A랑 같이 할 수 있겠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며 존대한다. A씨와 김 차장님은 동갑이었다.
A가 일했던 회사의 사장님, 김 차장님 등은 A를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 생각했었을까? 아무렇지 않게 A에게 반말을 내뱉으며 해고 통보를 하였던 그 사장님의 목소리에서 필자는 어떤 당연함을 느꼈었다. A에게는 그렇게 대해도 된다는 당연함. '우리'가 아닌 사람을 대하는 어떤 당연한 태도 말이다.
속지주의 원칙이 적용되는 우리 법은 국적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법 적용 대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때때로 그렇지 않다. 국적에 따라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외국인들이 내국인과 어딘가 다르기 때문임을 은연중에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들은 때때로 우리 법이 보장하는 타인의 어떤 권리를 침해하기도 한다.
민주주의의 외부인
현대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란 인민들에게 평등하게 부여된 참정권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와 의무, 기타 이해관계를 공론장에서 상호 협상하는 절차를 말한다. 즉, 민주주의 사회 구성원이라면 자신의 권리와 의무, 이해관계에 대하여 타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사법적 차원에서는 우리 사회 구성원이 맞다. 우리 법이 적용되어 권리를 부여받고 납세 등 관련 의무를 부담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공론장에서 협상할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한국 땅에서 일할 때 일방적으로 우리 법에 종속되기만 할 뿐이다.
즉, 속지주의 법 원칙 상 외국인 노동자는 법에 종속된 우리 사회 구성원이지만,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협상할 능력이 없다는 측면에서 우리 민주주의 사회 구성원은 아니다.
모순이라면 모순일 수 있는 이런 사실을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이해한다. A에 대한 사장님의 태도가 그렇게 차별적일 수 있었던 것은 A가 민주사회의 외부인임을 은연중에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위험한 일자리, 민주주의의 외부인이 가게 되는 곳
민주주의의 당사자가 되지 못한다는 점은 외국인 노동자를 '위험'으로 내모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외국인 노동자가 종사하는 사업장은 대체로 '위험'하여 내국인 노동자가 기피하는 현장이다. 실제로 고용허가제를 통해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려면 내국인 구인에 실패해야 하기도 한다. 내국인이 기피하는 일자리여야만 외국인 노동자가 일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적 전제는 외국인 노동자의 '안전할 권리'를 앗아갈 수 있다.
지난 6월, 경기도 화성시 아리셀 사업장에서는 외국인 노동자 18명이 불타 죽었다. 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안전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 화재 시 대피 경로에 대한 안전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고, 대피 경로에 보안 장치가 설치되어 있어 화마를 피할 수 없었다.
아리셀 참사가 있은지 벌써 넉 달이 지났다. 그러나 박순관 대표이사는 아직 유가족들이 바라는,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다.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유가족들에 대한 화성시 등 정부·지자체의 지원도 요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