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운 최제우 대신사 피체(被逮)수운 선생은 선전관(宣傳官) 정운귀(鄭雲龜)가 이끄는 관군에 의해 계해(1863)년 12월 10일에 경주 용담에서 여러 제자들과 함께 피체(被逮_체포)된다. 본 그림은 현재 경주 용담정 수운 대신사 존영 우측에 위치한 병풍속 그림중에 하나이다. 수운 선생 피체당시 참혹한 상황에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전문가의 평가이다. 수운 대신사를 존경하는 화가가 공손하게 끌고가는 관군과 약간은 태평하게 포박되어 따라가는 모습으로 그린것 같다.
천도교 용담수도원
수운, 조선 왕조에 피체되다
조선 왕조는 유교의 성리학에 반하는 어떤 종류의 도(道)와 학(學) 즉 종교를 이단으로 몰아붙이며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수운 선생과 동학을 지목하여 탄압해오던 중, 아예 뿌리를 뽑아버리기 위해 1863년 10월부터 압살할 계책을 논의하여 왔다.
급기야 11월 20일 조선 정부로부터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된 정운귀(鄭雲龜)가 이끄는 관군에 의해 계해(1863)년 12월 10일(양.1.18)에 경주 용담에서 수운 선생은 여러 제자들과 함께 피체(被逮_체포)된다.
정운귀(정운구)는 최복술(최제우)을 체포하여 서울까지 압상(押上)한 전후 경위를 임금에게 보고하는 문서인 서계(書啓)에서 자세히 밝혔다. 선전관 정운귀가 올린 서계 '고종실록 1권, 고종직위년 12월 20일 임진 6번째 기사 청 동치(東治) 2년 선전관 정운구가 최제우와 동학에 대해 보고한 문건'을 살펴보겠다.
또한 수운 선생의 체포과정과 순도과정을 강시원(강수)의 <최선생문집도원기서>, 그리고 표영삼의 <동학이야기> 등을 중심으로, 당시 상황을 재현시켜본다.
정운구는 11월 20일에 무예별감(武藝別監) 양유풍(梁有豊), 장한익(張漢翼), 좌변포도청군관(左邊捕盜廳軍官) 이은식(李殷植) 등을 거느리고 경상도 경주 등지에서 동학의 괴수를 자세히 탐문하여 잡아 올릴 목적으로 바삐 성 밖으로 나가 신분을 감추고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은 수운 선생과 제자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용담 인근에 몸을 숨기고 숨소리도 발소리도 죽여 가며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운명의 그날, 마침내 1863년 12월 10일(음) 새벽 1시에 이르자 갑자기, "암행어사출도야!!" 하는 청천벽력과 같은 함성이 울리면서, 용담 집을 포위한 병사들이 기습으로 덮쳐왔다.
무예별감 양유풍과 장한익, 좌변포도군관 이은식, 종자 고영준 등이 앞장서 칼과 창으로 위협하였고, 교졸들은 육모방망이를 사정없이 휘두르며 쳐들어왔다. 순간 잠들었던 방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으며,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와 함께 피를 흘리며 끌려나오고 있었다.
수운 선생은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 기다린 지 오래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나를 잡아가라!!"며 천지가 진동하듯 소리를 외쳤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더니, 별감 양유풍은, "이건 어명이요!"라는 왕명임을 강조하면서, 한 번 예를 갖추고 수운 선생을 결박하라고 지시한다.
교졸들이 멈칫하며 두려움에 떨자 별감 장한익은, "어명이다! 최복술(최제우)을 결박하라!"라며 다시 명령을 내린다. 수운 선생이 전혀 반항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교졸들은 결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수운 선생은 결박된 상태로 '하늘을 우러러 큰 한숨을 짓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양유풍은 수운 선생의 인격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라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나, 장한익은 공을 세우려고 수운 선생에게, "대역죄인은 당장 무릎을 꿇어라!" 하며 고함을 질렀다. 이에 응하지 않자 별감 장한익과 포도군관 이은식은 힘센 교졸 몇 명에게 다그치며 죄인을 무릎 꿇리라고 소리를 지르며 명령하였다.
그래도 꿈쩍하지 않자 장한익, 이은식과 덩치가 큰 교졸들은 방망이로 사정없이 수운 선생을 구타하였다. 이렇듯 강제로 무릎을 꿇리는 과정에서 수운 선생의 옷이 찢겨지고 온몸에 피멍이 들었다. 더 심한 것은 머리 부위를 가격당해 피가 흘러내려 누군지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수운 선생과 제자 23명을 차례로 오라에 묶어 무릎을 꿇렸다. 박씨 부인과 맏아들 세정(世貞)도 함께 체포되었다.
용담집에 없었던 최자원(崔子元)과 이내겸(李乃兼)은 어사 출도 전에 본 부(府)에 긴밀히 글을 띄워 잡아 가두라 했으며, 밀정에게 속아 동구에서 길을 안내해 준 장가도 같이 잡아들이라 하였다.
체포된 인원은 모두 합쳐 30명이나 되었으며 수운 선생을 제외한 나머지는 일단 경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때 체포되어 끌려간 수운 선생과 제자들은 형언할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다행히 최경상(최시형)은 수운 선생의 지시대로 움직여 화를 면했다.
「수운 선생이 피체될 때
이를 직접 목격한 제자들과
가족들의 구전이 전해지는데,
옷이 다 찢겨졌고
산발한 머리부터
온몸에 피가 난자하여,
누군지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전혀
굽힘의 자세가 없었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대장부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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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또 현(現)천도교선도사·직접도훈, 전(前)전주녹색연합 공동대표, 전(前)전주민예총 고문, 전(前)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이사 등 종교·환경단체에서 임원을 엮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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